친구와 함께 겨울 즉흥 산행

선암사에서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

by 본격감성허세남

눈이 많이 왔던 어느 겨울날, 혼자서 전남 순천의 선암사를 찾았다. 엄청나게 큰 절이거나 대단한 국보가 있거나 한 곳은 아니지만 선암사 특유의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보물로 지정되어있는 아치형의 승선교가 주는 매력도 크다. 어렸을 때는 미처 몰랐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보니 이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보인다.


원래 선암사에 갔다가 금방 올 계획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산을 넘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혼자 가기 아쉬워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뭐 하냐? 나 선암사인데 지금."

"오 웬일로 선암사?"

"그냥 놀러 왔어. 여기서 올라가서 산 넘어서 송광사로 내려가면 되게 좋다던데 그거 해볼까 하거든. 전에 해본 적은 없지만. 같이 갈래?"

"근데 나 집에서 출발하면 1시간은 걸릴 건데 괜찮냐?"

"괜찮아. 기다릴 테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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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밟고 선암사로 가는 길


그렇게 갑자기 2인 겨울 등산 팀이 구성됐다. 시작 전에 몸도 따뜻하게 할 겸 선암사 안에 있는 찻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시작했다. 많은 절에 찻집들이 있다. 그리고 경험해보면 상당수 절 내 찻집들의 차 퀄리티가 상당히 좋다. 직접 수확한 차는 아니겠지만(설마...) 커피 말고 아직도 차를 접하기 쉽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곳을 보면 참 반갑다. 커피가 주는 느낌과 차가 주는 느낌은 확실히 다르니까. 더 느리고, 더 여유 있고, 가끔 말에 공백이 생겨도 좋은 그런 느낌이랄까. 특히 절에서 마시는 차라면 더욱 그렇다. 불교는 아니지만 절의 이런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겨울 등산 시작하기 전 따뜻한 차 한 잔


드디어 선암사에서 출발. 둘 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채로 일단 무작정 출발했다. 등산복도 아니고, 눈에 대비한 등산화도 아니었다. 설마 조계산이 뭐 얼마나 힘들겠어, 남자 둘이서 거기를 못 가겠어하는 그런 허세가 있었던 것이 사실. 그 생각은 얼마 안 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눈 덮인 겨울 산행이 이렇게 힘들 줄은 전혀 몰랐다. 일단 발이 쭉쭉 미끄러지니 신경이 엄청 쓰였고, 한두 번은 넘어지기도 했다. 만만하게 봤던 조계산의 오르막은 왜 이렇게 가파르던지 원래 이곳이 이런 산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작한 산행이 중간부터는 매우 고요한 산행이 되었다. 눈 밟는 뽀드득 소리, 가끔 헉헉 대는 숨소리, 나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 소리. 이 3가지 소리만이 주위를 울렸다. 주말도 아닌 평일 이런 날에 누가 산행을 하겠나. 등산 내내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잘못 온 것 같아."

"몰라, 일단 다시 내려가면 더 위험하니 가자."


중간에 유명한 보리밥집이 있다. 사실 조계산을 넘는 이 코스를 가는 이유는 오로지 저 보리밥집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유명한 보리밥집이다. 이런 고생을 하며 갔는데 그 어떤 밥이 맛이 없으랴. 아마 태어나서 내가 먹어본 비빔밥 중에 가장 맛있는 비빔밥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중간에 그런 꿀맛 휴식이 없었다면 3시간 조금 넘게 이어진 산행은 아마 엄청난 악몽으로 남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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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송광사


산은 해가 특히나 빨리 진다. 힘든 고생 끝에 송광사에 도착한 게 오후 4시경. 이미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뒤였다. 더 늦었으면 더 위험했을 거다. 남자 둘은 역시 무모하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도착은 했네."

"근데 나는 아마 당분간 절대 산에 안 갈듯 하다."


그래도 즉흥적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함께 해준 친구 덕분에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나 혼자였으면 금방 내려왔을 거다. 고생은 금방 잊히고, 기억은 곧 좋은 추억으로 미화된다. 날은 추웠지만 마음은 무척이나 따뜻했던 산행으로 남은 걸 보면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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