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모두의 여행은 즐겁다
MBTI가 대유행이다. 처음 검사를 해본 게 굉장히 오래전이었는데 그동안 잠잠하다가 갑작스레 유행을 하니까 조금 의아하기도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굉장히 긍정적인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될 수 있으니까. 아마도 '저 사람은 대체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나 보다. 혈액형처럼 단순 재미 이외에 큰 의미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본다.
문득 내 여행의 모습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왜일까 하고 보니 MBTI 유형 중 특히 마지막, P냐 J냐가 영향을 크게 끼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P다.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금방 이렇게 되묻는다.
"아니, 너가 어떻게 P야?"
늘 정리도 잘하고,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기고, 책상도 매우 깔끔하고. 그런 걸 보면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사회화된 모습이다. 여행할 때 내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P다. 여행은 순수하게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한다. 때문에 여행이야말로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P의 여행은 확실히 다르다.
철없던 21살 시절, 누나와 함께 남도 종단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계획은 매우 거창했다. 버스를 타고 전북 부안에 내린 후 거기서부터 쭉 내려가서 배 타고 제주도까지 가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엄청난 여정.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지도책을 몇 개 사서 틈날 때마다 멈춰 서서 그걸 보고 가기로 했다.
숙소? 가다가 적당히 잡으면 되겠지.
길은? 설마 자전거로 못 가는 길이 있겠어.
자전거 수리는? 그런 기구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 자전거는? 나는 10만 원짜리 중고를 하나 샀고, 누나는 신문 구독하고 받은 무거운 접이식 자전거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부안에 도착해서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그전에 자전거를 길게 타봤거나, 아니면 이런 여행을 위해 연습을 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뭐 별 일 있겠어하는 생각이 컸다. 햇빛을 가리겠다며 밀짚모자를 썼다. 자전거 타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건 생각도 안 했나 보다.
여행은 누나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로 시작 후 15분 만에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가다가 아무도 없는 도로 중간에서 바퀴에 펑크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나. 참 대책 없지만 그땐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다시 생각해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혼자 유럽 여행을 갔던 시절, 내 여행 경로는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왔다가, 그다음에는 또 야간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가지를 않나.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즉흥적으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기도 했다. 기껏 그렇게 바르셀로나로 갔다가 스페인 다른 곳은 가지 않고 다시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등등. 그런 와중에도 예상외로 특히 좋았던 도시가 두 곳 있었다. 프랑스 니스, 체코 프라하. 어쩌다 갔고, 의외로 너무나도 좋아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들이다.
니스는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가다가 하루에 가기엔 너무 멀어서 그냥 들른 곳이다. 바다가 좋다는 소리만 듣고 전날 유스호스텔 예약한 후 일단 내렸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게다가 한겨울 1월에 무슨 바다냐 하면서 잠깐 하루 쉬었다 가려했다.
그러다가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이후에도 니스에 3~4번은 일부러 다시 갔다. 그저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는 것도 좋았고, 지는 해를 보며 혼자서 식은 피자를 뜯어먹는 것도 좋았고, 근처 이름 모를 빵집에서 갓 나온 바게뜨 빵을 사서 뜯어먹는 것도 좋았고, 시장 근처에서 오가는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가끔 이유 없이 취향 저격하는 곳들이 있다. 니스가 내게는 딱 그런 곳이었다.
프라하는 독일 베를린에서 빈으로 가기 전에 들른 곳이다. 드레스덴에 갔다가 바로 빈으로 가자니 너무 늦어서 프라하에 2박을 예약했고, 그 참에 조금 둘러보다가 가려고 했다. 첫날은 늦게 도착해서 어두컴컴한 길을 찾아가며 한인 민박에 간 터라 그다지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둘째 날 본격적으로 돌아본 프라하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관광 도시가 있다니! 구시가지의 카페라든지 음식점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완벽하게 단장되어 있었고, 무료 Wifi도 여기저기 잘 되어 있음은 물론, 엄청나게 맛있는 맥주, 유명한 체코 필의 클래식 연주회, 그리고 무엇보다 흔히 생각하는 '유럽'에 가장 부합하는 아름다운 도시 풍경까지. 대체 이런 곳을 왜 모르고 있었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좋았다. 곧바로 숙소를 2박 더 연장했고, 이후 신혼여행까지 프라하로 다시 올 정도였으니.
지금도 추운 겨울만 되면 프라하에 있는 <카페 루브르>에 가서 따뜻한 핫초코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언젠가 꼭 다시 가고 말테야.
대만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에 성대한 불꽃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여행 잡지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특히 매년 한 도시를 골라 그곳에서 가장 크게 메인 행사가 열린다고 되어 있었다. 마침 정월 대보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상황. 충동적으로 대만 항공권을 끊었다. 목표는 대만 중부의 작은 도시 루강.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대만 중부의 큰 도시인 타이중으로 가서 먼저 짐을 풀었다. 도착하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거기서 루강까지 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을 했지만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등불축제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데 루강까지는 대체 어떻게 가야 하는가가 일단 가장 큰 문제였다. 날은 저물어가는데 정보는 없고, 일단 주변에 대충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라, 어디서 버스를 타라 등등 잘 알려주는 것 같았지만 나는 중국어를 못 하니 제대로 알 턱이 있나.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떤 버스를 단체로 탔다.
"루강?"
"응 맞아. 거기 가." (아마 대충 이런 뜻인 것으로 이해)
올 때도 사람들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타이중?"
"응 맞아. 타." (아마 이때도 대충 이런 뜻인 것으로 이해)
갈 때는 110 타이완 달러를 줬는데, 올 때는 왜 22 타이완 달러만 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오갔으니 성공 아닌가? 무엇보다 등불축제는 예상외로 엄청 화려하고 멋졌다. 참 용감했단 말이지.
P의 여행은 이렇게 즉흥적이다. 계획을 짜고 움직이기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고, 상황에 맞게 대응을 한다. 특히 나 혼자나 우리 가족만 편하게 갈 때는 그런 경향이 훨씬 더 심해진다. 뭐가 됐든 즐거우면 된 것 아닌가 하는 태평한 마음이 크다. J가 보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여행을 하지, 위험하지 않나, 시간이 아깝지도 않나, 불안해서 어떻게 다니지 등등.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다. 그럴 때 내 반응은 주로 이렇다. "뭐 어찌어찌 되더라고요."
성인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MBTI 정도 정밀한 모델이 유행하는 건 긍정적이라고 본다. 저 사람은 이렇구나, 나와 다르지만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니까.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J가 보기엔 이해가 안 가겠지만 P는 저런 여행이 즐겁다. 반대로 P가 보면 J처럼 꼼꼼하게 짜여진 여행을 답답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저건 진짜 여행이 아냐."라고 하겠지만, 그 역시도 틀린 말일 거다. 패키지여행을 가는 걸 보고 자유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시절이 정말 있기도 했다. 진짜 가짜가 어딨나. 다 같은 여행인 것을. 다만 형태가 조금 다를 뿐.
어쨌든 모든 사람의 여행은 즐겁고, 나는 또 여행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