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덴 타고 에노시마 가기
누군가 나에게 먹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수박이라 답한다. 또 누군가 나에게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슬램덩크'라 답한다. 세상엔 참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적어도 이 2개 분야에서만큼은 가장 선호하는 것이 아주 확실하다.
"오늘, 여기서 널 쓰러뜨리고 간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나는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그래, 난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이지."
"왼손은 거들뿐"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수많은 명대사를 남긴 바로 그 만화!
일본 도쿄로 여행을 갔을 때 내 가장 큰 목표는 바로 슬램덩크에 나온 곳들을 가보는 것이었다. 특히 만화 슬램덩크 오프닝에 나오던 기차가 지나가는 건널목과, 만화책 엔딩의 에노시마 해변. 이 2가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야말로 '로망'이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런 여정이었다.
에노시마 해변은 도쿄에 있지는 않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인 가마쿠라 지역에 있는데 일단 그곳까지 가서 또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후지사와 역까지 1시간, 거기서 옛날 전차 같은 '에노덴'을 기다렸다가 타고 또 10분 넘게 가면 오프닝의 바로 그 장소에 도착한다.
그래 바로 이 장면이다! 만화가 나온 지 20년이 훨씬 더 지났는데 여전히 이 지역은 만화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일부러 보존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일본은 이런 지역들이 은근히 많다.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우리나라 서울 및 수도권과 매우 다른 신기한 점이다.
그냥 보면 흔한 건널목인데, 그거 하나 본다고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니, 그리고 그 사람들이 기차가 오니까 다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한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웃긴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어떠랴. 누군가에게는 그저 흔한 곳이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멋진 곳보다 더 인상적인 곳이 되는 법. 좋은 콘텐츠의 힘이 이렇게나 무섭다. 내가 성공한 덕후 같은 느낌, 뭔가 뿌듯하고 나 자신이 기특한 느낌, 가만히 앉아 여유 있게 슬램덩크나 뒤적이고 싶은 느낌. 한마디로 표현하면 흐뭇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진짜는 에노시마 해변이었다. 가마쿠라코코마에 역에서 에노덴을 다시 타고 조금만 가면 나오는 해변인데, 사실 그 자체로는 크게 볼 것은 없다. 을왕리나 강화도의 동막 해수욕장 같은데 가도 이런 풍경은 충분히 있다. 멀리 선명하게 보이는 후지산이 이곳이 한국 서해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을 말해줄 뿐, 그게 아니라면 아마 그냥 스쳐 지나갈 그런 곳이다. 하지만 여기는 그 슬램덩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곳이다. 서태웅이 조깅을 하고, 강백호가 편지를 읽고, "물론! 난 천재니까"하던 바로 그곳. 아아. 내가 마침내 그곳에 왔다.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잠시 감회에 빠지기도 했다가, 서태웅처럼 뛰기도 했다가, 강백호처럼 뒤 돌아보기도 했다가, 혼자서 점프샷도 찍었다가, 기타 등등. 사람이 많이 없었기에 다행이지 얼마나 웃겼을까. 그래서 작은 아이가 자꾸 내 주위를 맴돌았던 것일까. 남이 뭐라 하든 내 가슴속에선 한가득 뿌듯함이 차올랐다.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준 작가님에게 고마웠고, 여행을 올 수 있게 허락해준 아내에게 고마웠고, 믿진 않지만 하느님/부처님/그 누구든 다 감사를 표한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를 끝낸 느낌.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했지만 덕분에 매우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안녕, 다음에 또 올게. 물론! 난 덕후니까!"
살면서 이런 사소한 목표와 즐거움 몇 가지가 있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물론 내 경우엔 그 상당수가 여행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갈 곳은 많은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