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니는 회사는 입사 후 3년을 무사히 보낸 기념으로 1개월 휴가를 갈 수 있게 해 준다. 입사 후 정말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 휴가가 드디어 나왔다. 비록 1개월을 바로 다 가지는 못하고 끊어서 2주만 먼저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나왔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무척이나 흥분됐다.
휴가가 가까이 다가오자 만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물어봤다.
"어디에 가세요?"
"아 계획 중이에요. 아내도 있고 애들도 있으니 저 혼자서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그런데 문득 '응?'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세요?"가 아니라 "어디 가세요?"라니? 내가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 많이 가는 걸 알기에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 후로 자세히 살펴보면 휴가가 다가온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긴 휴가, 그것은 곧 어딘가로 떠나는 것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무 데도 안 가요."라고 하는 사람이 진짜 가끔 보였는데 그럼 그다음 질문이 비로소 "그럼 뭐 하세요?"였다. '그럼'이라는 말이 덧붙는, 약간 의외라는 반응이 섞인 질문이었다.
나는 당연히 여행을 가긴 할 것이었고, 실제로 이렇게 여행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걸 당연하게 여겼을까? 여행은 당연히 가는 걸까? 아니 애당초 왜 여행을 가는 걸까? 그것도 불편한 자리와 긴 비행시간을 감수하면서 모르는 곳까지. 사실 여행은 몸과 정신이 매우 피곤한 일인데 그걸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반복적으로 떠나고 있고, 게다가 상당히 많은 지출까지 하고 있다. 그 돈으로 무언가를 샀으면 오랫동안 남기라도 할 텐데 여행 다녀오면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살까 말까 고민하는 혼다 슈퍼커브 110은 안 사면서, 그걸 사면 이후 몇 년 동안 일상에서 굉장히 유용하고 재미있게 쓸 수 있을 거면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드는 여행에는 거리낌 없이 지출을 한다. 여행은 자세히 보면 굉장히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런데 그걸 또 하고 있다.
처음 유럽 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열심히 모으고 모은 돈을 주식 시장에 넣었는데(대체 하나도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의문) 그게 또 운 좋게 2배로 불어나서 덕분에 꿈꾸던 유럽 배낭여행을 갈 수 있었다. 그땐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게 굉장히 많았다. 내 전재산을 쏟아붓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유레일 패스를 구입하고, 살 때 준 지도를 보면서 어디를 갈까 계속 고민하고, 서점에서 여행 책도 사서 정독하곤 했다.
"손님 여러분, 이 비행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아시아나 항공..."
이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흥분했었지.
'내가 드디어 이 비행기를 탔다! 하림 1집을 수도 없이 들으며 상상했던 1번 트랙의 그 방송을 내 두 귀로 직접 듣다니! 와 나는 정말 성공했구나.' 했던 것 같다.
여행지에 가서도 발에 불이 나도록 걸어 다니면서 1분 1초를 아껴서 온갖 것들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정말 피곤했는데, 밤이 되면 바로 곯아떨어지곤 했는데, 그래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일찍 숙소를 나섰고 그게 행복했다.
이번엔 어땠지? 아내가 통 크게 허락을 해줘서 무려 2주간 혼자 가는 여행의 기회를 얻었는데 짐은 전날 늦게서야 1시간 정도만에 후다닥 쌌다. 아침에는 뭔가 무덤덤하게 지하철 타고 공항에 와서 체크인을 했다. 면세점 구경도 안 하고, 커피도 안 마시고, 그냥 게이트에 와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시간이 돼서 비행기에 탔다. 이젠 웬만한 태블릿 스크린만큼 큰 기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으로 영화나 봐볼까 하고 한 바퀴 다 둘러봤지만 딱히 보고 싶은 영화도 없고, 결국 음악이나 들었다. 영화가 이렇게나 많은데. 예전엔 영화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든 영화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고 실제로 잠깐 간접적으로나마 발 담그기도 하고 그랬는데. 애 키운 뒤로 영화를 거의 못 봐서 여기 있는 영화들도 대부분 다 안 본 건데.
'나는 왜 떠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