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떠날까? - 2

by 본격감성허세남

총 11박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 포르투갈의 포르투와 리스본. 이렇게 3개 도시를 중심으로 가게 됐다. 비행기 때문에 1박 하는 로마도 있고, 중간에 필 받으면 다녀올 근교의 다른 도시들도 치면 더 많겠지만 어쨌든 중심 도시는 3개인 셈이다. 출발일이 다가와서 날씨 예보를 보는데 이탈리아 도시들은 맑고 기온도 적당한 반면 포르투갈은 포르투부터 리스본까지 내내 비 예보였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 그랬다. 출발일이 되면 바뀌겠지 하는 희망을 품었지만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니 11월인데 무슨 장마야 뭐야 하면서 찾아보니 포르투갈, 특히 포르투가 있는 북부는 11월이 우기의 핵심이란다. 원래 비가 많이 오는 것은 물론이요 어떤 사람은 작년에는 3주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왔다 했다. 모든 사람이 꼭 우산을 챙기라는 말을 했다. 내가 상상한 포르투는 이런 게 아닌데? 포르투갈 가는 계획을 짜긴 했지만 월별 날씨 이런 걸 한 번도 찾아보지도 않았다는 게 그제야 생각났다.


출발 전날 저녁, 짐을 싸고 아내에게 슬픈 소식을 알렸다.


"망했네. 포르투갈에 내내 비 예보야."

"와 운이 진짜 없네. 하필 그러냐."

"아니 그냥 11월엔 원래 비가 많이 온대."

"그래? 근데 그걸 예약할 때는 몰랐어?"

"어. 그냥 포르투갈에 가야지 하고 생각만 했지 찾아보지도 않았네.."

"에? 오늘 안 거야?"


그런데 묘하게 뭐 어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 진짜 싫어하는데 나 스스로도 의외였다. 뭐 어때라니. 내가 좋아하는 노을도 못 볼 것이고, 바지도 홀라당 젖을 것이고, 아무리 고어텍스 운동화라지만 계속 비가 오면 신발도 젖어서 잘 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우산 들고 캐리어까지 끌려면 힘들 텐데? 그런데도 별 걱정은 안 됐다. 내가 이렇게 관대한 사람이 아닌데 결코. 나 스스로도 전혀 예상 못 했던 내 반응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여행 관련 글쓰기를 거의 안 했다. 여행을 안 한 건 아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기회를 찾아서 여기저기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뭔가 쓰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생기지 않더라. 예전에는 혼자만을 위해서 쓰기도 하고, 어렸을 때의 여행을 하나도 기억 못 할 아이를 위해서 쓰기도 했는데. 여행을 다녀오면 잊기 전에 꼭 글로 남기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전혀 남기지 않게 됐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날씨 생각 덕분에 다시 여행 글을 쓰고 싶어졌다. 바뀐 내 모습을 보니 내 여행도 이전과는 확실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아니 사실 이미 바뀌어왔는데 그걸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는 이상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확 바뀌진 않는 법이니까.


어차피 이동하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으니 한 번 깊게 생각해 봤다. 왜 관대해진 걸까. 혼자 가서 그런 걸까? 그런데 올해 엄마를 모시고 갔던 대만 여행에서도 비 예보가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비가 안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지 내내 비 예보라 망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때도 그랬네? 그럼 뭐지?


결론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여행이니까, 게다가 해외여행이니까 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여행을 가면 일상과 완전히 단절된다. 특히 해외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시차도 크게 나고, 지리적으로도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통신망도 국내랑 완전 다르다. 유심이 바뀌기도 한다. 연락이 안 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려니 한다. 어느새 나는 이걸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완전한 단절. 오로지 순간 내 생존과 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환경. 어찌 보면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로워질 수 있는 환경이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새롭기에 즐겁기도 한 환경. 그게 바로 여행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스마트폰 시대가 된 이후로 잠잘 때만 빼고 늘 누군가에게 시달리게 됐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 책임져야 할 것도 많아지면서 이런 게 더욱 심해졌다. 정보가 넘쳐나지만 그만큼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이 된 거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스마트폰 없이 여행하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여행을 가면 무조건 관광안내소를 찾아서 그 지역 지도부터 얻었다. 주로 지도에 표시된 곳을 가고, 가끔 밥을 먹거나 할 때는 직감을 믿고 들어갔다. 실패도 많았지만 대신에 그만큼 성공에 대한 기쁨이 더욱 컸다. 지금은 실패를 거의 하지 않는다. 구글맵만 켜도 너무나도 많은 리뷰들이 있으니까. 대신 재미가 덜해졌다. 가기 전에 너무 많은 것을 보면 가서 얻는 것도 적어진다.


그래도 해외로 여행을 계속 가는 이유는 그런 기회라도 온전히 얻기 위함이다. 내가 모든 걸 직접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여전히 핵심은 자유다. 예전에는 아무 걱정 없이 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자유였지만 이제는 내가 모든 걸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또는 우리 가족만을 위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유로 바뀌었을 뿐이다. 40대가 될 때까지 수많은 시간 동안 닳고 닳아버린 나지만, 동시에 내가 가는 여행도 닳고 닳아 이제는 조금은 무덤덤해졌지만, 그래도 또 떠나는 이유는 아직 자유롭다는 생각 그거 하나만큼은 닳지 않아서인 것 같다. 맞다. 잠시나마 현실 도피다.


비가 오면 어때. 그때 맞춰서 적당히 하면 되지. 색다른 곳을 걷고 색다른 걸 보고 색다른 걸 먹으면 된 거지. 꼭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곳에 못 가면 어때. 이국적인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나 한 잔 마시지 뭐. 계속해서 여행을 다니다 보니 욕심도 사라져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이런 게 성숙한 모습이라면 항상 쫓기듯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던 20대가 부럽진 않다.


아, 떠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 잘 곳은 과연 괜찮을까, 내일은 뭐 먹지 같은 생각만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비행기는 너무나도 겹고 여행지에서 가끔 정말 별로인 상황에 처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런 건 순간이더라. 오랫동안 남는 건 잠시나마 한없이 자유로웠던 그 시간들이고, 그게 그리워서 오늘도 또 어딘가로 떠난다.

매거진의 이전글왜 떠날까?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