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by 본격감성허세남

회사 자리에는 항상 수첩과 자주 쓰는 볼펜 하나를 둔다. 주로 해야 할 일을 체크하는 용도인데 직접 쓰면서 체크하는 맛이 제법 좋다. To Do를 정리하는 방법이야 정말 수도 없이 많은 데다가 이제는 각종 알림까지 꼬박꼬박 보내주기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는 저런 아날로그 방법을 고집한다. 일단 쓰는 맛이 있다. 최근 몇 년 간 만년필로 한참 쓰다가 작년부터는 마음에 드는 볼펜을 만나서 다시 볼펜을 쓰고 있는데 필기구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이 재미있다.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글씨체가 달라지기에 가끔 이전에 쓴 부분을 보면 그때의 기분이 생각도 난다. 글씨를 너무 안 쓰는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점점 더 많이 쓰게 된다.


AI가 아니면 아무런 이야기도 못 하는 그런 세상이다. AI 덕분에 거의 모든 부분에서 효율은 날이 갈수록 엄청나게 오르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많은 콘텐츠들이 생산된다. 거기에 드는 사람들의 노력은 거의 없어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사람들이 많이 볼까? 정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할까? AI가 만드는 정보에는 거의 수고가 들지 않기에 동시에 쉽게 무시되고 잊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성의 문제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건 덜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나에게 잘 남지도 않는다. 사실 그건 AI만 그런 건 아니다. 어렸을 때 불법 다운로드로 잔뜩 깔았던 게임들은 결국 손도 제대로 안 댄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대학생 시절에 메일링 리스트에 등록되어 오던 정보들은 곧 스팸이 됐고, 여기저기서 선물로 받은 물건들은 뜯지 않은 것들도 많다. 이런 것도 다 정성의 문제라고 본다. 스마트폰 시대 이후로 등록된 전화번호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정작 외우는 번호는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잖아. 음악을 듣는 양이 옛날보다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건 예전에 CD 앨범으로 들을 때보다 훨씬 적어졌잖아. 쉬운 건 언제나 스쳐 지나간다.


아날로그 방식은 힘들다. 수고도 많이 들어가고 효율도 떨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는 소리기도 하다. 저런 단순한 할 일 리스트마저 작성하는 데 작게나마 고민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정성이 들어가는 건 대량 생산이 어렵지만 그만큼 많이 남게 되는 것 같다. 저렇게 적은 건 잊어버린 게 정말 거의 없다. 하루에도 수없이 울리는 각종 알림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더 잘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것들은 일부러라도 손으로 적곤 한다. 다 했을 때 손으로 취소선을 쭉 긋고 완료 체크를 하는 쾌감도 있다. 디지털 목록에서 어떤 거 하나를 지우는 단순한 액션과는 확실히 다른 그런 쾌감, 정성은 적을 때뿐만 아니라 지울 때도 들어간다.


서점에 가면 날이 갈수록 '필사' 책이 많이 보인다. '컬러링'이라는 이름으로 굳이 엄청 많은 걸 세세하게 칠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모두 다 AI를 활용하면 순식간에 끝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이지만 꼭 효율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성 들여 무언가를 하는 아날로그적인 그런 것을 필요로 하나 보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역시 아날로그 방식으로 해야 한다. 정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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