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혼자였다.

그를 알아본 건, 내 안의 허전함이었다.

by driftoralone



그는 특이했다.

그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묘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무심하려 애썼지만, 어느 순간 그는 조용히 내 시선을 붙잡았다.


무엇을 하든, 그는 그 순간 안에 깊이 잠긴 사람 같았다.

급하지도, 튀지도 않고, 오히려 조용했지만

그의 리듬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결이 있었다.


나는 그 낯선 집중에 괜히 조용해졌고,

단단한 태도와 느긋한 호흡은 이상하게도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이란 걸

오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나 지위만 보고 그 길을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누군가에겐 꽃길처럼 보일 그 길도

사실은 단단한 마음과 애정으로 다져낸, 조용한 돌길이라는 걸.


그래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조용히 다듬어 가는 그에게 눈길이 갔다.


이미 사회의 흐름에 익숙해질 만한 순간에도

어떻게 저런 순수함을 지키고 있는지.

그 단단함이 진심인지, 버팀인지.

나는 자꾸 궁금해졌다.


직장에서 그의 모습은 특별할 것 없어 보였지만

그 흐름이,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그의 시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조용히 그에게 몰입했고,

그는 부드럽지만 흔들림 없이

자기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그 시간이 또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의 시간이 내 한 주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처음엔 밝고 당당한 그의 시간에 그저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지?

그 뒤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시간이 아닐 때 그는

때론 나보다 더 부끄러움이 많고,

어딘가 어두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말을 잘하던 사람은 사라지고

스몰토킹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의외의 모습이

나를 그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고 싶게 했다.

궁금했다.


그 사람과 있으면 별다른 얘길 하지 않아도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의 낯선 모습이

나를 더 끌리게 했다.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나는 재미없는 사람,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개인적인 연락을 하고,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만나기도 했고,

그는 내 연락에 답장을 해주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도

그는 가까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한강공원을 걸으며 보던 시그니엘 같았다.

멀리서도 보이지만,

절대 가깝지 않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과 반응에

허탈함을 느꼈고,

내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과는

무게감이 다른 사람 같았다.


속은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분석적이지만

겉으로는 친절하고, 배려 깊게 보이는 나였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크게 어렵지 않았고,

항상 무난히 지냈다고 믿었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

철저히 계산적이었고,

그래서 바라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서는 달랐다.


진심을 다해도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낯선 감정들을 몰고 왔다.


그는 그저 낯을 가리고,

선을 그었을 뿐인데


그 말랑하고 조용한 태도에서

묘한 단단함이 느껴졌다.


어느새,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단순한 친밀함을 넘어,

호감이라는 이름이 자라났다.


그래서 말했다.

좋으면 좋다고,

그가 내게 어떤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 건넸다.


나는 원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투명하게 흐르는 말들에, 대부분은 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내 마음을 조용히 담아두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눈으로 들었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멀리 있었다.


처음 느끼는 조용한 설렘이었다.

내가 그 후 조금 더 솔직해진 건,

그 조용한 감정에 내가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답장은 점점 느려졌고

사적인 만남을 약속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그럴수록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친절함과 호감에도 반응하지 않는 그가 궁금했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내가 더 궁금했다.


나는 연애를 시작할 때,

늘 조건을 먼저 보았다.


감정보다 안정,

설렘보다 불안을 덜어주는 선택이었다.


외모보단 학벌,

성격보단 직업.


그 사람을 좋아하기보다,

함께 있는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

사랑이라 믿었다.


내게 사랑은,

그저 흔들리지 않기 위한

하나의 버팀목이었다.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왜 좋아?”라는 질문을 받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키가 커서, 성실해서, 날 좋아해 줘서.


그런데 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유는 매번 달라졌고,

매일 좋기보단 매일 새로웠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어?”

“이 사람은 도대체 뭐야?”


좋아하는 만큼,

머릿속엔 물음표가 자라났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제는 아무리 더 잘생긴 사람,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나타나도

내 마음은 단 한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다는 걸.


내 안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에

왜 이제야,

천년의 첫사랑을 혼자 하고 있는지.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며칠을 고심했고,

결국 닿은 건 —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고,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재미있는 그가 끌렸다.


나는 언제부터

재미없는 사람이었을까.


어릴 적, 나는 엄한 환경에서 자랐다.

내 감정은 항상 무시당했고,

타인의 감정은

아무 설명도 없이 강요됐다.


어린 나는 늘 규칙에 따라 움직였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그게 —

어린 내가 선택한,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버티는 방식이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나’ 일 수 있었던 시간은

성악을 하던 시간이었다.

어렸지만 그 순간,

내 감정을 노래에 녹여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진학을 앞두고, 부모님은 말했다.

“그건 취미로 두는 거야.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에,

유일하게 ‘나’였던 성악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때 이미 난,

‘내 의견’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냥 부모님의 말이 맞고

내 의견은 불편했다.


그리고 그 후,

친구들을 사귀며 알게 되었다.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걸.


겉보기엔 아무 문제없는 관계였다.

늘 웃고, 들어주고, 위로하는 아이.

친구들에게 나는 엉뚱하지만 섬세한 친구였다.


하지만 정작 내 감정은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무거워질까 봐,

기댔다고 느끼게 될까 봐.


남의 감정은 함께 나눠야 했고,

내 감정은 혼자 감춰야 했다.


가끔 선을 넘는 말이 와도

왜 불쾌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성적인 관계는 하나의 환상이었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내가,

그 관계 안에서는 정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관계에 집착했고,

그 안에서 나를 자주 놓아버렸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점점 무의미해져 갔다.


지금도 친구들은,

내가 많은 연애를 했다고

가볍게 웃으며 말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 앞에 서면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고 부딪히던

그 시절의 나 자신이 떠올라

묘하게 마음이 아프다.


작고 억눌려 있던

어떤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문득,

내가 왜 그토록 ‘재미있는 사람’에게 끌렸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에게 재미있는 사람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걸 스스럼없이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잠기지 않으면서도

그 마음을 자기 것처럼 조심히 다룰 줄 아는 사람.


나는 아마, 오래전부터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옳다 말하는 길만 따라가던 시간 속에서

나는 나에게 점점 시시한 사람이 되어갔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감정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마음이 머물렀다.


내가 애써 눌러두고 살아온 감정들,

그냥 이 정도면 괜찮다고 타협했던 나의 마음을,

그가 조용하지만, 정확히 건드렸다.


나는 그를 따라가다가

내 안의 공허함과 마주했고,

그 끝에서 내 마음을 처음으로 꺼내게 되었다.


그 감정은 단순한 호감도,

말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랑도 아니었다.


때로는 설렘, 때로는 질투,

어쩔 땐 혼란이었고, 또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감정들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진짜로 마주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 감정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혼자여도 괜찮은 사랑이니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