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닿은 곳엔, 낯선 내가 있었다.
설렘.
언제나 뜻밖에 찾아오는, 반갑지만은 않은 감정.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마음 한가운데 조용히, 그러나 깊게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로,
어느새 내 하루 곳곳에 스며든다.
내 설렘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시작됐다.
스쳐간 눈빛 하나,
조금 다른 공기를 품은 그날의 분위기 하나.
이름도 감정도 붙이지 못한 채
그의 잔상이 조용히 내 하루를 적셔왔고,
나는 모르는 사이, 마음이 그의 그림자를 따라 기울고 있었다.
그 감정 하나로 그를 만나는 날엔 아침부터 설렜고,
답장 속 이모티콘 하나에도 기분이 들썩거렸다.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밤새 생각을 반복했다.
설렘은 순수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가장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 된다.
방향 없는 감정에는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던 나였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현실이 흐려졌다.
참고 있던 마음이 자리를 잃고, 일이라는 외투에 묻혀 흘러나온 날.
결국 진심은 업무 뒤로 숨어버렸고,
돌아온 건 익숙한 말투의 친절함이었다.
문득, 나무랄 거 없는 그의 말투에
내가 쌓아온 감정들이 붕 뜬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 롤러코스터를 타는 내 감정처럼
그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 자기가 살아온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대요.
근데… 책임지기 싫으면 어떡하죠?”
어느 날, 반쯤 농담처럼 던진 말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성형하면 되죠.”
누군가는 무심하다 했을 그 말이,
그날의 나에겐 묘하게 명쾌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나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사람.
나는 선을 잊고 감정에 휘청였다.
처음 사랑을 배우는 사람처럼 굴었고,
자꾸만 바보처럼 솔직해졌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 믿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불편한 정적이 흐르던 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우리, 여기서 안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마음속 기대가 배어난 말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어… 안 만났겠죠. 계속.”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선명했다.
순간, 나만 훨씬 앞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나와 같은 지점에서
이 감정을 바라본 적 없었다.
보통은 여기서 마음을 접는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그랬을 거다.
단번에 끊어내고,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내 하루에 스며들어 있었다.
취미, 음악,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들.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픽사 애니메이션조차 다시 보게 됐다.
감정은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문득,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닿지 못한 내 마음보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돌아봤다.
나는 늘 솔직한 걸 내 매력이라 믿었다.
감정이 생기면 바로 표현했고,
할 말은 해야 했고,
불편하면 관계를 끊었다.
그런 내 태도에 그는 자주 놀랐다.
감정을 조심스럽게 품는 사람이었기에,
나의 직진은 때로, 그에게는 날카롭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태도를 따라 하며 처음 느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세심하게 대했는지를.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의 배려가
그에게는 꽤 큰 노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그가 느꼈을 부담을
나는 너무 늦게야 짐작했다.
그를 사람으로 다시 보게 됐고,
그를 닮고 싶어 시작한 변화가
어느새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그가 좋아한다던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다,
문득 궁금했다.
그는 어떤 장면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을까.
늘 괜찮다고 웃던 그 마음 안쪽엔,
조용히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숨어있었던 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귀엽다며 웃던 장면에서
그는 조용히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들은 그만의 말투와 눈빛,
조심스러운 배려 속에서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내 세계가 조금씩 넓어졌고,
그의 언어에 맞추려다 보니
일상도 감정도 더 섬세해졌다.
남들은 억지라고 했던 나의 모습에
나는 처음으로 확신을 가졌다.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내 세상이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들었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들을 배웠다.
예전 같았으면
그를 멋있다고 느껴 호들갑 떨었을 순간들도
조용히, 나만의 언어로 아껴둔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내 안에서 익어가며
언젠가 하루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그를 닮고 싶어서 시작한 변화였지만,
어느새 나는 내가 되어갔다.
그를 향해 뛰던 마음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닿았다.
나는,
처음보단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이 감정을 나는 여전히 ‘설렘’이라 부른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긴 감정이 아닌,
내 삶의 결을 바꾸고,
나를 이해하게 만든.
결국 나를 사랑하게 만든 마음.
설렘은,
어쩌면 처음으로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