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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04. 2020

1400만 원으로 14개월 세계일주,
후기 (2)

44개국의 44색 이야기

2016.12.07 ~ 2018.02.08 : 세계여행이 가르쳐 준 것



11. 페로 제도 - 비밀스러운 신비의 섬


“나는 어부야. 다음 달이면 또 승선하러 나갈 거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부인데, 가장 돈을 잘 버는 직업이기도 해.”


인구가 5만 명도 안 되는 덴마크령 페로 제도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대화한 현지인은 어부였다. 어찌나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던지 그냥 무턱대고 피자집 앞에 서 있는 커플에게 다가가 페로인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말을 걸었다. 사실 여기선 어부가 굉장히 인기 있는 직종인 만큼, 그가 어부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전 세계 어딜 가나 의사, 판사, 변호사가 촉망받는 직업이라지만, 그게 페로 제도에서도 통용되는 사실일까. 20년 간 살인사건이 1건인 이곳에서.


외부와는 거의 교류가 없는데도 북유럽답게 물가와 생활수준이 높은 페로 제도는, 마치 지구에서 동떨어진 채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사는 것 같았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풍경 속에 꾸린 그런 세계. 수도 토르스하운을 벗어나 다른 섬으로 넘어가면 평일 오후에도 문을 연 카페 하나 찾기가 어려운, 길거리에 몇 시간 동안 단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단절된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살짜리 꼬마애가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한다는 것. 버스 기사가 탑승한 외국인에게 관광 책자까지 참고하라며 건네준다는 것. 이곳은 앞으로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페로 제도



12. 스웨덴 -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사정


“스웨덴이 돈을 잘 번다고? 진짜 부자 나라는 노르웨이야. 스웨덴 사람들은 노르웨이로 돈 벌러 가는걸.”


“그… 내가 보기엔 둘 다 부자 같은데…”


북유럽, 그러니까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복지 국가들이다. 그만큼 시민들의 삶의 질도 높고 외국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일까. 스웨덴 스톡홀름의 호스트 토마스에게 들은 말은 나를 황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렇게 잘 사는데도 더 잘 사는 나라로 굳이 일을 하러 간다니.


게다가 예상외로 스톡홀름에도 거지가 존재했다. 조금 색달랐던 점은, 주민들과 마치 친구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다는 것 정도? 돈을 받아도 씩 쿨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외치는 것도. 조금 덜 비굴한 거지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하지만 매해 스웨덴에서 반년 일하고 동남아로 가서 반년 휴양을 즐기는 식으로 여생을 보낼 거라던 토마스의 계획은 확실히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진국의 방식임엔 틀림없었다. 똑같이 스웨덴에서 태어나더라도 노르웨이로 갈지, 아니면 동남아로 갈지 정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 판단 문제겠지.

스웨덴 - 스톡홀름



13. 체코 - 나만의 기준


“프라하 구시가지는 완전 리틀 코리아야.”


프라하 호스트 이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현지인들은 그쪽으로 가지도 않는다고 덧붙이면서. 굉장히 기대됐던 프라하지만 이리의 말을 듣고 시내로 나서기가 살짝 걱정됐다. 비교적 한적한 나라들을 거쳐오며 북적거리는 인파 속으로 들어가기가 조금은 두려웠던 것인지. 


그래서 첫날 시내 관광을 마치고는 외곽 탐험을 시작했다. 공원, 자전거, 펍, 현지식, 놀이공원, 코젤 공장과 스타로프라멘 공장까지. 모두 동떨어진 곳에서.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프라하 시내나 야경이 아름다운 까를교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조용한 프라하를 발견했다. 그런 프라하의 두 모습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3일 정도 있으려던 계획을 일주일로 늘려버렸고, 떠난 후에도 이리의 연극 공연을 보러 돌아오기도 했다.


“도브리덴-”


프라하 근교 도시에 사는 이리의 부모님 집에 가서 수줍게 외워온 체코 인사말을 건네자, 어머님은 함박웃음을 띠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직접 만든 가정식과 가장 좋아하는 맥주를 대접하시곤, 내 옆에 꼭 붙어 연거푸 셀카를 찍기도 하셨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데도 이렇게 마음속 깊이까지 따뜻한 교감을 느낄 수 있다니.


사실상 여행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프라하성이나 까를교일 필요는 없다는 것. 가장 따뜻했던 장소, 가장 맛있었던 음식, 가장 좋았던 술, 그건 모두 이리의 부모님 집에 있었다.

체코 - 체스키크룸로프



14. 슬로바키아 - 여행의 동기


“어쩌다가 세계일주를 하게 된 거야?”


브라티슬라바의 카우치서핑 모임에 가서 들은 질문이었다. 나는 세계일주를 왜 시작했을까.


거창한 동기랄 건 없었다. 휴학 직전, 미국 캘리포니아의 벨몬트라는 아기자기한 (비싼) 동네에서 인턴을 하게 되면서, 조용한 (비싼) 집을 구해 소소한 (비싼) 밥을 해 먹으며 여름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하루 일과는 해 지기 전 일찍 퇴근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언덕 맨 아래에 위치한 마트에 가서 커다란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 오는 것이었다. 특별히 다를 것이 없던 그날도, 이어폰을 꽂고 털레털레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며, 어느덧 익숙해진 풀내음과 새소리에 미소 짓고 있었다. 공원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늘 그렇듯 그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가 주차장부터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를 법한 작은 (비싼) 동네에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만의 분위기가 있는데, 이 세상엔 내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매력 넘치는 동네가 얼마나 수두룩하게 많을까. 언젠간 그 수많은 도시들을 방문해 각각의 매력을 발굴해내고 싶어졌다.


휴학이 승인되고, 한국에 들어와 직장을 잡으며 그 꿈은 이내 흐려졌다. 짧게 경험만 쌓으려고 들어간 직장에선 승진을 거듭하다 10개월을 눌러앉아 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복학할 시간이었다. 갑작스레 아쉬움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졸업 후에도 어차피 일을 하게 될 건데, 나는 뭐하러 휴학 기간을 일만 하며 보냈을까. 그때, 잊혔던 꿈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사이 레드불 캔유메이크잇 유럽 무전여행 대회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도전하면 현실이 된다는 용기를 얻었다. 몇 달 후 박카스 국토대장정에 참가하여 계속되는 정신적, 체력적 한계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배웠다. 그렇게 차츰 확신이 들었다. 세계일주 역시 꿈이 아니구나.


돈이 필요했다. 저축과는 거리가 멀어 그동안 번 돈도 증발시켜버린 나에겐 생소한 일이었다. 일단 4개월 후 출발하는 항공권을 무턱대고 끊고는, 과외를 열서너 개씩 하기 시작했다. 안 보는 책도 모아서 중고로 팔았다. 목표는 1200만 원. 하루 3만 원씩, 한 달 100만 원씩, 일 년 하기에 충분한 경비라고 생각했다. 약속은 거의 잡지 않았고, 충동구매 역시 하지 않았다. 3만 원 정도 되는 돈을 안 쓰면 나중에 하루를 더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쉬웠다. 난생처음으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이 통장에 쌓였다.


그렇게 떠났다. 이 세상 수많은 도시들이 궁금했다. 각각의 집을 나서는 거리가, 공원에 펼쳐진 풀밭이, 마트로 건너는 도로가 익숙했으면 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동안 그들만의 매력을 내뿜었으면 했다. 벨몬트처럼.

슬로바키아 - 브라티슬라바 도나우강



15. 오스트리아 - 일상이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을 때


“<아가씨>라는 한국 영화가 개봉했는데,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빈에서 만난 펜팔 콘스탄틴의 제안이었다. 각국의 영화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국보다 조금 늦게 오스트리아의 몇몇 영화관에 개봉한 <아가씨>에 관심을 보였다. 나 역시 보지 못한 영화였기에 선뜻 승낙했다. 그게 대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여행을 나온 후로, 한국 영화를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일반 영화관에도 간 적이 없었다. ‘영화 관람’이라는 흔하디 흔한 문화생활이 갑작스레 특별하게 와 닿는 기분이 생소했다. 그런데, 초면의 외국인 남자랑 보는 <아가씨>는… 음, 특별하다 못해 특이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서 개봉한 것이니 <아가씨>에 나오는 수많은 일본어 대사에는 독일어 자막이 깔렸다. 나는 분명 한국 영화를 보는데도 태반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콘스탄틴 역시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더니, 나의 이해를 도와야 할지 난감해하다가 “음, 별로 중요한 대사는 없었어.”하고 어물쩍 넘겨버렸다.


영화가 끝나고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작된 대화의 주제는 엉뚱하게도 빈의 야경이었다. 


다음 날 아침, 잘츠부르크에서 카우치서핑을 하기로 한 호스트 게르하드에게서 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다예! <아가씨>라는 한국 영화가 개봉했다는데,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오스트리아 - 할슈타트



16. 영국 - 나의 발자취를 찾아서


“어머, 다예 아니니?!”


영국 브리스톨의 첫 목적지는 바로 내가 잠깐 다녔던 초등학교 앞. 벨을 누르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뒤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시 교장 선생님을 14년 만에 만났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 남아 있던 다른 선생님들도.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선생님들은 나의 기억력을 배려하듯 한결같은 웃음을 지었다. 시나브로 저 멀리 도망가 버린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내 제2의 고향이라 여기는 브리스톨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은 그저 무턱대고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익숙한 돌담, 길목, 가게가 여전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그간 낮은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가 초라해 보였던 적이 많았다.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열등감에 시달렸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브리스톨의 길거리를 거닐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이 소중한 추억들은 이 세상을 통틀어 오로지 나만 갖고 있는 거라고. 그 누구도 그 자리에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진 못할 거라고. 나를 비로소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나만의 경험이니까.


괜스레 뿌듯해졌다. 14년 전 이곳에서의 사소한 사건 하나하나가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기적이.

영국 - 세븐시스터즈



17. 프랑스 - 언어의 한계


“아… 미안해요.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듣겠어요.”


아마 프랑스에 있는 내내 가장 많이 썼던 문장일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어와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무척이나 많았고, 자연스레 이번 여행에서 유독 프랑스에 대한 기대가 컸다. 대학에서 배운 초급 불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여행 중에도 매일 앱으로 공부를 계속해오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직접 불어를 쓰며 다니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 줄 알았다.


물론 오산이었다.


프랑스 현지인들의 발음은 따발총처럼 빨라서, 내가 아무리 고심하고 문법에 맞춰 질문을 조심조심 건네도, 그 답변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개 국어에 생존 중국어, 불어 정도는 배웠으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여행을 하면서 현지인들이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재미있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간절히 배우고 싶어진다. 특히 모로코 같은 나라에서 4개 국어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더더욱.


사실 여행 중에 언어가 필수로 통해야 하는 건 아니다. 몸짓으로 대화하는 것도 정말 기억에 많이 남고, 아무 지장은 없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상대방이 영어를 못하고 나도 현지어를 못하면 조금 아쉬웠다. 웬만하면 영어를 잘하는 카우치서핑 호스트들 덕에 궁금증은 거의 다 풀며 다녔지만.


또 장기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땐 중국어,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까지 하고 싶은 바람이… 물론 마음속에만.

프랑스 - 카르캉



18. 스페인 - 독특한 문화의 매력


“그라나다에 있는 모든 주점은, 술을 시키면 타파스(간식/사이드디쉬)를 무료로 줘. 추가 주문을 할 때마다 더 맛있는 메뉴가 나오곤 하지. 다른 가게로 자리를 옮기지 않도록 고객을 사로잡는 그들만의 전략이야.”


유럽의 서로 닮은 거리와 반복되는 건물, 비슷한 문화에 점점 흥미를 잃어갈 즈음,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기다리던 스페인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은, 또 하나의 새로운 유럽이었다.


그 어떤 국가에도 스페인을 빗댈 순 없다. 타파스, 시에스타, 플라멩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문화가 한가득 수놓아진 이 나라는, 40도가 넘는 더위에도 굴하지 않고 내게 좋은 인상만을 남겨주었다. 밤 10시가 지나도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야외에서 맥주를 즐기는, 그런 느긋하고 태평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어느 술집이든 타파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도시 그라나다는 내게 천국이었다. 맥주 한 잔을 시켰더니 타파스가 세 접시나 나오길래 민망한 나머지 한 잔을 더 주문했는데, 또다시 타파스를 두 접시씩이나 주는 바람에 저녁을 때워버린 일도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독특한 문화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렇게 늘 새로움을 갈구하는 여행에서, 스페인은 신선한 터닝포인트였다. 이곳에선 어떤 것을 마주하든 색다를 테니까.

스페인 - 발렌시아 세일링 중



19. 모로코 - 이슬람과의 첫 만남


“단지 무슬림이란 이유로 테러리스트가 아닌지 의심하고, 여권 심사를 통과시켜주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게 너무너무 싫어.”


모로코에 입국하기 전 설레면서도 걱정되던 그 오묘한 기분을 기억한다. 설렜던 이유는 난생처음으로 방문하는 이슬람 국가였던 만큼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문화를 알아갈 수 있다는 두근거림 때문이었고, 걱정되었던 이유는 의도치 않게 그들의 문화에 반하는 행동을 내가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첫 도시 탕헤르로 향하는 배에서 내리기 직전, 나는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팔 긴바지로 갈아입기 바빴다.


마침 내가 도착하던 날은 라마단이 끝나는 주말이었고, 모로코의 일상생활 속 깊이 침투한 이슬람 문화는 매일매일이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해질녘까지 단식을 하고 어두컴컴해진 후에야 온 시민이 우르르 몰려나와 달콤한 차를 즐기던 모습. 미로같이 어지러운 메디나에 빽빽이 진열된 물건을 팔던 모습. 남정네들이 카페 앞에 줄줄이 늘어앉아 길거리를 구경하던 모습. 이것은 가슴을 뛰게 할 정도의 ‘다름’이었다.


모로코인 친구 함자와 대화하던 중 잠깐 IS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코란엔 다른 종교 역시 존중하라는 구절이 있다는 말을 해주며 속상함을 털어놓았다. 함자를 비롯한 많은 모로코 친구들은 서양 세계의 미디어를 극도로 싫어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 놓고,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극소수 무슬림의 이미지를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선입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편견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직접 겪어보기도 전에 미리 결론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걸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생소한 문화라도 더 많이 접하고 익숙해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 잘 모를수록 쉽게 아무거나 믿고 오해하게 되니까. 먼 미래에 우리나라에도 모스크와 아랍인들이 좀 더 많아지면 인식이 달라질까.

모로코 - 메르주가 사하라 사막



20. 튀니지 - 세상 가장 따뜻한 사람들과의 인연


“이거 다 너 가져.”


세계여행 내내 고맙게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온갖 친절은 다 받아봤지만, 튀니지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내 튀니지 펜팔 에이야와 그녀의 가족은 정말이지 내가 튀니지란 나라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노력이든 다 할 것 같았다. 


에이야의 사촌언니들은 영어를 할 줄 몰라서 나와 소통이 쉽지 않은데도 매 식사마다 날 초대해서 배가 빵빵해지도록 먹여댔다. 내 접시와 컵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비면 끊임없이 더 주면서 "eat! eat!"하고 웃으며 외치곤 했다. 내가 아랍어로 어설프게 맛있다고 말하면 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그들은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다가 꼭 기념품 가게엘 들렀다. 뭘 잔뜩 사길래 '이런 게 현지인들한테도 신기한가 보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웬걸, 헤어질 때가 되자 “이거 다 너 거야”라며 자석부터 펜, 접시까지 모조리 나한테 주는 게 아닌가. 밥을 사주거나 잠을 재워주는 사람들은 봤어도 살다 살다 기념품까지 사주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마지막 날, 에이야의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시장에 가더니 전통 의상 가게에 들어갔다. 곧 전통 행사가 있나 싶어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대뜸 원피스 하나를 건네며 입어 보란다. 한사코 사양해도 억지로 탈의실로 등 떠밀어 보내던 그녀는 내가 옷을 입고 나오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로 계산을 해버렸다. 


매일같이 부대끼며 같이 자고 먹고 놀다 보니 정말 내 진짜 가족이 된 것만 같았던 이들. 튀니지를 떠나는 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아쉬웠던 건 오롯이 에이야네 가족 때문이었다.

튀니지 - 시디부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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