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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05. 2020

1400만 원으로 14개월 세계일주,
후기 (3)

44개국의 44색 이야기

2016.12.07 ~ 2018.02.08 : 세계여행이 가르쳐 준 것



21. 에티오피아 - 여행의 첫 고난


“짐이 안 왔다고? 일단 여기 신고서 작성하고, 찾으면 연락이 갈 거야.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성의 없는 공항 직원의 안내에 나는 힘이 쭉 빠졌다. 그동안 꽤나 순조로웠던 여행이 한순간에 막막해졌다. 튀니지에서 사우디를 경유하여 에티오피아로 왔는데, 수하물이 없어져 버린 것. 드디어 ‘진짜 아프리카’를 경험할 생각에 설렘 반 긴장 반이었는데, 에티오피아는 처음부터 나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이틀 후면 화산으로 3박 4일 투어를 떠날 예정이었고, 짐이 없으면 옷조차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자정부터 아침까지 공항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기다렸지만 짐도 오지 않았고 픽업을 온다던 투어 회사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뭘 입고 어떻게 씻지? 이게 정말 없어진 거면 집으로 가야 하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대폰 유심 슬롯이 고장 나서 인터넷도 쓸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유심 없이 다녔기에 고장 난 줄도 몰랐다. 와이파이 같은 건 당연히 없는 곳에서, 나는 유심도 없었고 짐도 없었고 멘탈도 없어졌다.


내 여행을 통틀어 에티오피아만큼 모든 것이 열악했던 나라가 있을까. 화산을 올라가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힘들어서 난생처음으로 탈수 증세가 왔고, 카우치서핑을 한 곳은 물이 나오지 않아 씻지도 못했다. 제대로 정비도 안 된 흙길을 달리던 버스는 덜컹거리다 못해 거의 무너질 것 같았고, 실제로 도로 한복판에서 고장 나는 바람에 승객 전원이 길거리에 나앉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절대 잊지 못할 곳. 여행은 언제나 낭만적일 순 없으니까. 매일매일이 계획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던 에티오피아에서 나의 밑바닥을 보았고, ‘될 대로 돼라’ 마인드를 배웠다. 덕분에 아프리카에서의 나머지 일정은 힘들지도 않았던 느낌.

에티오피아 - 에트라 에일 화산



22. 케냐 - 결국은 다 사람 사는 곳


“오우, 폭동이 걱정된다고? 이번엔 괜찮을 것 같은데. 정 그러면 집에만 있어. 뭔 일이 나도 슬럼가에서만 날 거니까. 어휴, 나는 새벽 3시부터 투표소에 줄을 서러 가야 하는 걸.” 


나이로비 호스트 세실리아는 나의 걱정 어린 질문에 쿨하게 대답했다. 10년 전 선거 때 1000명이 넘게 죽었기 때문에 8월 선거 전에 케냐를 빠져나가려던 나의 계획은, 에티오피아 덕분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의도와는 정반대로 딱 선거 날짜에 맞춰 나이로비에 머물게 된 것.


결국 이번에도 선거 후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사실 내가 겪은 케냐는 예상외로 잠잠했다. 사람들이 조심하느라 밖으로 나오질 않아 잠잠했던 것인진 몰라도.


세실리아와 그녀의 친척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줄을 서러 갔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투표를 마치고 손톱에 받은 인증 마크를 자랑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세실리아의 조카 조이를 데리고 나가본 나이로비 시내는, 그전까지 우릴 괴롭히던 악명 높은 교통 체증은 온데간데없이, 텅 비어 있었다. 차가 하나도 막히지 않아 오히려 편했던, 아이러니한 기억이 난다.


케냐에 도착하기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가보지 못한 몇몇 나라에 ‘위험하니 그곳에선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물론 어떤 나라들은 실제로 죽을 만큼 위험하기도 하고. 하지만 막상 겪어본 케냐는 걱정이 무색하게, 그저 다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었다.

케냐 - 나이로비 기린 센터



23. 우간다 - 너무나도 다른 세상에 대한 충격


"너 혹시 슬럼가에 가봤니?"


"슬럼가? 못 가봤는데... 거기 위험한 거 아니야?"


"음, 그렇긴 한데, 현지인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 내가 데려가 줄까?"


캄팔라에서 만난 우간다인 스티븐이 데려가 준 슬럼가.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긴장된 몸을 감싼 채, 쓰러져가는 판잣집들이 들어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니 다 해진 우스꽝스러운 옷을 걸친 아이들이 흙탕물 위로 망아지마냥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길이 안 보이는데 진흙탕 위에 놓인 판자떼기를 가리키며 이게 길이란다. 그저 막연하게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해 왔었는데, 난생처음으로 가본 슬럼가는 상상 이상의 카오스였다.


누군가가 연극 의상으로 쓰고 버린 듯한 만화 캐릭터 코스튬을 대충 걸쳐 입고 전력질주를 하는 아이가 있었다. 흙이 너무 많이 묻어 본연의 색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는 미로 같기만 한 슬럼가를 다른 아이들 무리와 함께 요리조리 누벼대며 함성을 질렀다. 지구 반대편엔 깔끔하게 다린 교복을 입고 의자에 붙은 듯 앉아 시험지를 풀어대는 동갑의 아이가 살고 있다는 걸 생각조차 못한 채.

우간다 - 진자



24. 르완다 - 산타클로스가 된 외국인


“무중구! 무중구!”


외국인을 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고아원이 없어지는 바람에 작은 마을에 고아들이 모여 살게 된 이곳. 이 '고아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수십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십여 분 내내 노래를 불러주고 박수를 쳐주기 시작했다. 미리 사온 비눗방울을 높이 불어주자 눈 앞에서 기적이라도 본 듯 손을 위로 뻗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근처의 작은 유치원 겸 초등학교에도 갔는데, 여기는 대문을 열자마자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며 일제히 "무중구(외국인)"를 외쳤다. 녀석들은 서로 내 손을 차지하려고 다투었고, 머리카락을 만져대고, 품에 안기려고 파고들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자 다 같이 배운 ABC 영어동요를 힘차게 불러주기도 했다. 매니큐어를 발라주겠다고 하니까 여자고 남자고 간에 온통 먼저 손을 불쑥불쑥 내밀어 대려고 난리가 났다. 겨우 선생님이 줄을 세운 이후에야 나는 몇십 명의 손톱을 모조리 칠해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바르지 않을, 싸구려 핑크색 매니큐어였는데 다들 신기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자랑하며 뛰어다녔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들이 줄줄이 내 팔에 매달려 마을 입구까지 따라오던, 그 몽글몽글한 느낌이 생생하다. 누구보다 순수한 이 아이들 틈에 파묻혀 지낸 며칠은 참 해맑게도 쓰렸다.

르완다 - 기세니



25. 탄자니아 - 장기 여행자들과의 만남


“오빠 ㅋㅋㅋ 저희 능귀 가는 버스 놓쳐서 그냥 배 타고 다르에스살람 나가기로 했어요. 오빠도 오세요!”


“아 뭐야! 몰라! 나도 그냥 배 타러 돌아간다 그럼!”


여행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극을 많이 받는다. 아프리카에선 한국인 여행객을 생각보다 종종 만났는데,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눈물겹게 행복한 시간을 함께한 지환이, 제현 오빠와 원민 오빠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제대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세계여행을 떠난 지환이, 나보다 일찍 출발해서 아직까지도 여행 중인 제현 오빠, 자전거를 타고 7년째 방랑 중인 원민 오빠. 각자가 살아온 다른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삶에는 딱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룻밤을 함께한 후, 배를 타고 다시 다르에스살람으로 나가려는 제현 오빠와 능귀 바다를 보러 가려는 나와 지환이, 그리고 파제로 이동하려는 원민 오빠는 아쉬운 마음에 서로를 붙잡다가 결국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 한 시간 후. 우린 결국 다르에스살람행 배를 타러 모였다. 그렇게 거의 일주일에 달하는 시간을 함께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인연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탄자니아 - 다르에스살람



26. 잠비아 -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


“혹시 이 기차 언제쯤 다시 출발할지 알아?”


“아니… 전혀 모르겠어.”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의 ‘느리게 가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정신과 시간의 방은 아프리카의 타자라 열차.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 잠비아의 뉴카피리음포시까지 2박 3일을 달리는 이 기차는, 2시간도 20시간도 아닌 무려 2일이 연착됐다. 결국 총 4박 5일이 걸려 종착지에 도착하게 된 것.


세상에 이렇게 기약 없는 기다림이 또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에서 멈춘 기차는 움직일 줄을 몰랐고, 어떤 안내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엔진이 돌더니 뒤로 가지를 않나, 아침에 멈춰서 온종일 꼼짝도 않질 않나. 한국이었다면 상상치도 못했을 광경이었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항의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챙겨 온 현금이 다 떨어져 밥도 못 사 먹고 쫄쫄 굶게 될 즈음, 기차는 잠비아 국경을 넘었다. 현지인에게 휴대폰을 빌려서 잠비아 호스트에게 전화해 연거푸 사과를 했고, 그는 이틀간 내가 연락이 안 되었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으며 껄껄 웃어넘겼다. 


아, 한국은 정말 편리한 나라구나.

타자라 열차



27. 짐바브웨 - 큰 맘먹은 도전


"아프리카에서밖에 못 해보는 체험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꼭 해봤으면 좋겠어."


짐바브웨 불라와요의 호스트 놀리지는 내가 레게머리를 해보고 싶다고 넌지시 말하자 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괜찮은 미용실을 찾아보았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레게머리를 땋아 주는 곳을 꽤나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짐바브웨에선 유행이 지난 건지 아무도 선뜻 나서질 않았다. 계속 허탕을 치자 내가 괜찮다고 만류하는데도 그녀는 꼭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우겼다.


그러다가 옆집에 사는 아만다가 본인도 레게머리를 하고 있어서 7달러에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몇 시간씩이고 머리를 땋으며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던 그녀는 남편 없이 홀로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나이를 물어보자 그녀는 웃으며 말해주기 싫다고 답했다. 생각보다 너무 어려서 벌써부터 미혼모인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 같다고. (조금 지나자 그녀는 19세라고 털어놓았다.) 또, 한국에선 휴대폰이 얼마냐고 물어보길래 신제품은 900달러 정도라고 대답하자, 여기선 100달러인데도 한 달치 월급 수준이라 절대 못 산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내 머리를 만지며 어떤 약품을 써야 이 정도로 기를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어리둥절해진 내가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길어진다고 대답하자 깜짝 놀라면서 축복받았다고 부러워하기도.


난생처음 해보는 레게머리는… 아팠다. 두피가 뜯어질 정도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땋아 댔으니. 다 완성이 된 후에는 가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다 땋여버렸으니 긁기도 힘들어서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예전에 키수무에서 레게머리를 한 호스트 사이러스에게 안 가렵냐고 물어봤더니 땋기 전에 미리 머리를 감으면 괜찮다고 했었는데,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건지.


결국 야심 차게 한 레게머리는 나흘도 못 가서 다 풀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 색다른 헤어스타일엔 거부감이 있어 탈색조차 한 번도 못해본 내가- 평소 같았으면 하지 못했을 파격적인 도전이었다는 면에서, 나는 그 기억이 참 좋았다.

짐바브웨 - 빅토리아폭포



28. 남아공 - 미래의 구상


“여행하면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


어김없이 받는 이 질문에는, 한참 고심하다가도 결국 모로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거기엔 꼭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도 나중에 가장 살아보고 싶은 곳은 남아공이라고.


평생 미련 없을 줄 알았던 한국이 가장 그리웠던 건 미국에서 살 때였다. 외국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리함과 안정감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즐거운 거랑은 별개로, 확실히 한국의 익숙함은 따라올 수가 없다. 그래서 매번 ‘역시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라고 깨닫곤 한다.


하지만 남아공은 예외였다. 야생 동물, 바다, 산, 액티비티, 음식… 아프리카 종단을 하며 봐왔던 모든 하이라이트는 사실 남아공 한 나라에서 다 찾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이 색달랐고, 하루도 기분이 나쁠 일이 없었다. 다른 곳보다 훨씬 발전된 인프라 덕에 편리했고 수월해서, 과연 아프리카의 작은 유럽이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이곳이라면 나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꿈이 하나 생겼다. 나중에는 정착된 집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여행객이 아니라 거주자가 되어 한 도시 한 도시마다 오래 체류하다 떠나고 싶다고.

남아공 - 케이프타운



29. 터키 - 엄마와 함께한 여행

아프리카를 헤매던 어느 날, 엄마한테 연락이 왔다. 추석 연휴 즈음에 어디에 있을 거냐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함께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나는 터키에 있을 것 같다고 했고, 엄마는 막판에 비싼 비행기를 끊어 터키로 날아왔다.


엄마와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하면서, 서로의 몰랐던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그간 세계여행을 하면서 좀 더 어른스러워진 모습 - 이를테면 생활력이 강해진 것과 돌발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 등 - 을 보고 놀랐고, 나는 엄마의 의외로 애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엄마와 함께 클럽엘 가본 적이 있는가. 우리 엄만 나와는 달리 왕년에 댄싱퀸이었댄다. 욜루데니즈에서 해적선에 올라 보트 투어를 하던 중 거품파티가 열렸는데, 누구보다 신나고 자신 있게 무대에서 춤을 추는 엄마를 보고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쉬러 자리로 돌아와서는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싹 해소된다며 탄성을 내지르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엄마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즐거움을 잊고 살았을까.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같이 놀러 다닐걸.


익스트림 액티비티를 즐기는 내가 터키에선 꼭 패러글라이딩을 해야 된다고 엄마를 꼬시자, 엄마는 무서워서 어떡하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패러글라이딩이 끝난 후, 엄마는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건 처음 알았다며 난리가 났다. 마치 난생 첫 번지점프를 뛰고 흥분한 스무 살 때의 내 모습처럼.


엄마가 운전하는 차는 많이 타봤어도, 엄마가 운전하는 ATV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엄마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난 운전면허 삼수생이라, 하핫. 그래서 다음 목표는, 내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를 태우고 여행 다니기. 대학교 졸업할 때쯤 가능하면 좋겠는데.


세계일주한다고 나온 나에게 엄마는 늘 부럽다는 말을 했다. 혼자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 이색적인 문화를 즐기며, 나는 나만의 행복에 취해서 엄마의 그런 말들을 뿌듯함에 섞어 흘려버렸다. 나처럼 젊음이 있었더라면, 여유가 있었더라면, 엄마도 충분히 나와보고 싶었을 텐데. 내 여행과 내 발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가족은 잊고 있던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날 꼭 안아주던 엄마는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아무 말도 없이, 아주 조용히. 그건 아마 나와 떨어진다는 아쉬움보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앞둔 허전한 마음 때문일 테다. 당신은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살았으니. 감히 상상도 못 할 책임감을 짊어지러 다시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에 마음이 쓰려왔다.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내가 즐긴 자유를 똑같이 선사해줄 수 있을까.

터키 - 욜루데니즈



30. 아르메니아 - 소소함의 아름다움


“저어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줄 수 있나요?”


일곱 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부끄러운 듯 물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의 2799번째 생일 축제날이었다. 예레반의 작고 고요한 광장들은, 그 날만큼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온 가족이 나와서 신나게 즐기던 그 틈에도 동양인은 쉽게 눈에 띄었나 보다.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채자 예레반의 청소년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꼬마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자, 그들은 “I love Korea!”라며 귀여운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아르메니아까지 퍼져 있는 한류와 케이팝 덕분이었다.


“어떤 그룹이 제일 좋아? 엑소?”


“아니요! BTS!”


꼬마들은 사진을 찍고 헤어진 후에도 저 멀리서 자꾸 나를 흘깃흘깃 보며 웃곤 했다. 방탄소년단은 예레반의 길거리에 낙서까지 보일 정도로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곧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소년들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더니 세상 친한 척을 하며 셀카를 한 무더기 찍어갔고, 심지어는 축제 촬영을 나온 방송국에서도 인터뷰를 따갔다. 길거리를 지나며 난데없이 “사랑해!”하고 외치는 학생들도 종종 보였다.


예레반의 이 따스한 생일파티는, 런던의 새해 불꽃놀이나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축제보다 훨씬 덜 유명하고 소규모인 데다가 국제적이지도 않지만, 나는 이 소소한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온 시민이 한 가족이 된 느낌으로 길바닥에 분필로 낙서하는 아기자기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학예회처럼 깜찍한 아이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정말 아르메니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가장 꾸밈없는, 진실된 모습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아직 많이 관광화되지 않은 여행지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

아르메니아 - 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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