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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09. 2020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아프리카 종단기 3. 에티오피아

세계여행 최고난도 국가에서 살아남기

모로코에서 남아공까지 100일:
세계일주 200일 차에 모로코를 통해 도착한 아프리카 대륙.
300일 차에 남아공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딱 100일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아디스아바바, 에티오피아


내 아프리카 여행의 시작은 모로코와 튀니지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북아프리카에 속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이 일컫는 '아프리카 종단' 코스에 포함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부터 남아공까지 이어지는 국민 종단 루트는 난이도도 문화도 북아프리카와 확연히 다르다. 인접국을 방문할 수 없어 비행기로 이동했던 모로코, 튀니지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나는 이 종단 코스를 꼭 육로로 이동하며 온몸으로 체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종단의 시작이었던 에티오피아. 한국전쟁 당시 용맹하게 싸웠던 강뉴 부대가 에티오피아에서 온 군대였다는 걸 안 이후로 쭉 이 나라에 가보고 싶었다. 사실 참전용사들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아디스아바바에서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서 포기. 어쨌든 누군가가 아프리카 종단의 방향을 묻는다면, 나는 무조건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라고 조언할 것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상황이 더 나아지기 때문에, 거꾸로 올라온다면 에티오피아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질 테니까.

메켈레행 버스 밖 풍경

그러니까 에티오피아는 여행을 하기엔 정말이지 최악의 국가였다. 이곳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20일 아침 6시에 튀니지 수스에서 출발해 튀니스에서 8시 30분에 비행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6시간 경유를 위해 내렸다. 제다에서 밤 10시 30분에 이륙할 예정이던 비행기에 타자 아무 설명 없이 연착된 2시간을 꼬박 기다린 후 출발할 수 있었고, 아디스아바바엔 결국 새벽 3시에야 도착하고 말았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식사 마치고는 본인 상을 치우려고 말도 없이 식판을 냅다 내 것 위에 올리던 에티오피아 여자는 덤.


비자를 받고 수하물로 부친 배낭을 찾는데, 도무지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200명도 넘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카오스마냥 본인 가방을 찾기 위해 밀고 쑤시는 와중에, 혼자 외국인이었던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졸음을 참으며 내 배낭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인원은 줄어들지 않았고 내 배낭 역시 나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자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다들 본인 짐을 찾기 위해 뛰어다녔고, 나 역시 필사적으로 찾았으나 내 배낭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못 찾으면 어떡하지? 내 반년 인생이 들어있는 배낭인데... 한국에 가야 하나. 아니, 차라리 다 됐고 지금 가고 싶다. 내 방 침대에 누워서 푹 자고 싶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상당히 수월했던 여행이 한 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새벽 7시, 분실 신고를 하고 공항 홀로 나왔다. 배낭 소식은 언제쯤 알 수 있냐고 물었지만 자기들도 모른다며 찾게 되면 연락이 갈 테니 기다리란 말에 이미 힘은 다 빠진 상태. 아마 경유지에서 실수로 안 보낸 모양이지만, 그것도 확신할 순 없었다. 이미 숙소에 가기엔 늦은 시간이고, 에티오피아에서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여행사에 연락하여 공항 픽업과 무료 숙박을 받을 생각이었다. 왠지 시간이 너무 이른 것 같아 아무 데나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내가 울상으로 짐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걸 그 혼돈의 도가니에서 찾아보겠다고 열심히 뛰어다녔던 직원이었다. 왜 아직도 이런 데서 앉아 있냐며, 카페라도 가있으라고 나를 잡아끌고는 따뜻한 차를 계산해서 가져다주셨다.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되던 하루에 따뜻한 빛 한 줄기가 내려온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침 8시에 퇴근이라면서, 여행사에 전화할 수 있도록 휴대폰을 구해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도움은 아쉽게도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리 여러 번호로 전화를 해도 여행사는 받지를 않았고, 할아버지는 결국 번호를 남겨주시곤 집으로 가셔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한 시간을 꼬박 더 기다리며 온갖 방법으로 여행사에 연락을 해댔다. 튀니지 수스에서 출발한 지 무려 26시간이 넘었는데 이젠 잠조차 오지 않았다.


9시경에 겨우 연락된 여행사는 픽업 차량을 보내준다고 했고, 나는 한 시간을 기다린 후, 10시에야 차를 탈 수 있었다. 여행사에 도착해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다나킬 투어를 예약하고, 공짜로 받은 유심을 끼우려 했지만 휴대폰 유심 칸이 고장 나 또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숙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약 30시간 동안 제대로 자지도 씻지도 못한 채로. 잃어버린 배낭 속에 들었던 옷가지, 세면도구, 화장품, 슬리퍼, 상비약 등등은 하나도 없는 채로. 하지만 이틀 후면 떠나는 3박 4일 투어에 옷도 없이 갈 순 없었다. 배낭을 찾기 위해 사우디아 항공에 아무리 연락을 해봐도 전화조차 받지 않아 좌절감이 몰려왔다. 하필이면 주말이라 그런 것 같지만, 대체 어느 항공사가 주말에 쉰단 말인가.


이틀을 기다리고 답답해진 나는 결국 직접 공항까지 다시 찾아갔다. 수하물 텍을 내밀자 문서를 뒤지던 직원은 결국 내 기록을 찾지 못했는지 (애초에 짐을 찾아줄 생각은 있었는지 의문...) 갸웃거리며 다른 직원에게 혹시 모르니 분실물을 모아둔 곳으로 날 데려가 함께 찾아보라고 말했다.


어이없게도, 정말 어이없게도, 난 그곳에서 내 배낭을 찾았다. 텍을 보니 뒤늦게 제다에서 보내온 모양이었다. 찾게 되면 연락 준다던 항공사는 그동안 전화 한 통 없었고, 사무실 직원은 내 수하물 텍으로 트래킹조차 못했는데, 공항까지 가서 여기저기 뛰어다닌 내가 직접 찾았다. 이 시스템조차 제대로 안 세워진 곳에서 내심 포기 직전까지 갔었던 나는, 가방을 보자마자 너무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직원을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이 사람들이 도움이 됐건 말건 그저 가방을 찾았단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이 가방 하나 때문에, 나는 5개월이나 남은 여행을 포기해버릴 생각까지 했으니.

잘 타고 가던 버스가 펑크 나서 승객 전원이 거리에 나앉아 히치하이킹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티오피아에, 그러니까 "진짜 아프리카"에 도착하고 나서는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내 상식이 통하지 않던 곳. 30분 거리면 1시간이 넘게 걸려서 가고, 구글맵에 나온 위치도 맞지 않아 여기저기 물어봐서 찾아가야 하는 곳. 길거리 하나만 걸어도, 트램 한 번만 타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곳. 덕분에 느슨해졌던 마음이 다시 한번 긴장되었고, 내 물건에 대한 욕심 역시 더더욱 버리게 되었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없어져도, 삶은 계속되고 일상은 똑같이 흘러간다. 사람은 그 안에서 다시 크고 작은 행복을 찾으며 울고 웃는다. 


배낭을 찾고 나서는 유명한 한식집에 가서 한 달 동안 노래를 불러왔던 칼국수를 먹었다. 한국에 가야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디스아바바에서 먹게 되다니, 힘들었던 걸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갑작스레 비가 우리나라 장마처럼 쏟아졌다. 잠시 다른 건물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한참 동안 거리를 구경했다. 비가 그렇게 오는데도, 가방이 다 축축해졌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젖은 채로 몇십 분 낭비한다 해도, 아무렴 어떤가.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는데. 가방을 못 찾을 수도 있었는데. 한식을 못 먹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이런 사건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또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기며, 그렇게, 여유롭게. 소소하게. 행복하게.

아디스아바바에서 먹은 칼국수



메켈레,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다나킬 투어. 그렇게 나는 겨울에 시베리아에 간 것도 모자라 여름엔 지구 상에서 가장 덥다는 다나킬에 방문했다. 얼마나 다채롭던지 3박 4일간 에티오피아의 온갖 모습들을 다 본 기분이었으나, 그만큼 육체적 노동이 동반된다. 아디스아바바에 처음 도착해서 수하물을 잃어버렸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었는데, 그건 진심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된 고난의 결과는 값졌다. 대자연을 마주할 때는 더더욱. 에트라 에일 활화산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는 않지만,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 만한, 그런 장소였다. 강렬하게 뿜어대는 용암이 멋져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등산 끝자락에 거의 기절할 뻔한 곳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화산 옆에서 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이미 50도 온도에서 트레킹 하는 것 정도는 별 것 아닌 듯 느껴졌다. 

에트라 에일 화산에서, 쓰러지기 직전

다나킬 투어의 매력은 매일마다 전혀 다른 지형을 가볼 수 있다는 것. 화산에서 내려와 쉰 다음날엔 소금사막엘 갔는데, 낙타 상인들이 소금을 추출하여 운반하는 길이라고 한다. 바닥을 조금 뜯어서 핥아봤더니 진짜로 짰다.

낙타 상인들이 지나는 길

마치 우유니 소금사막에 온 것만 같았던. 온 세상이 하얀 것이 실감 나질 않아 자꾸 우주에 온 것만 같았다.

새하얀 소금사막

그러나 더 우주 같았던 곳은 바로 이곳, 유황천. 목성에 상륙한 기분이랄까. 달걀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아 자꾸 더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에티오피아의 관광은 극한으로 힘들지만 다들 오려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지형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로를 개발하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다나킬 유황천



아와사,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카우치서핑은 그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해졌다. 와이파이는 당연히 바라지도 못했고, 샤워가 안 되는 곳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정말 어떻게 사는지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기 위해 큰 불편함 없이 계속했던 것 같다.


아와사의 호스트 아쎄메나우는 선함이 얼굴에 쓰여 있는 선교사였다. 그의 가족들은 밖에서 본 "차이나! 차이나!"를 외쳐대는 천방지축 아이들과는 다르게 점잖은 티가 났다. 열몇 살 난 그의 딸이 매 끼니마다 직접 전통적으로 커피를 내려주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직접 로스팅하고 절구로 빻고 커피를 만들어 식후에 먹는데, 에티오피아에서 먹은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었다.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 같아 보이는 소녀였는데 어머니를 도와 온갖 집안일을 하는 등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아쎄메나우의 딸이 내린 커피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는데, 6.25 때 참전했던 역사가 있어 형제 국가라고 인식하는 듯했다. 아쎄메나우 역시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본인이 아는 6.25 당시 사건들에 대한 썰을 풀어내곤 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생고기를 잘 먹는데, 한국전쟁 때 다른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인육을 먹는 줄 알고 엄청 무서워했대." 


아와사에서는 5000원에 보트를 타고 아와사 호수에 들어가 눈앞에서 하마 떼를 볼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사파리를 하기 전이라 어떤 동물이든 신기해 보이던 시절.

코앞에서 본 아와사 호수의 하마



샤샤마네-딜라-모얄레,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케냐 육로 구간은 위험하고 고생스럽기로 악명이 높다. 웬만하면 다들 비행기 타고 간다던데 나는 돈도 없고 배짱만 좋아서 그냥 육로로 갔다. 비행기를 택했다면 더 빨랐겠지만 비쌌을 뿐만 아니라 그 악명 높은 육로 루트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변태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국경까지 내려가는 데 꼬박 3일이 걸리는 극한 여정에 나중에야 살짝 후회하긴 했지만.


이 여정 내내 시골 할머니 집 앞에 깔린 도로보다 못한 길을 다 무너져가는 버스(실제로 중간에 커튼 대가 무너짐)를 타고 끝없이 달려야 했다. 이 버스는 내가 30센티 버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도로 상태가 엄청 안 좋은데, 한 번 덜컹거릴 때마다 몸이 공중으로 30센티가 떠오르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14시간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맨 뒤에 타서 그런지 내 자리가 제일 다이나믹했는데, 위로 뜰 때마다 놀라서 비명을 질렀더니 쪼그마한 버스에 탄 50명 남짓의 흑인들이 전원 고개를 돌려 날 보곤 웃는다. 이 험난한 여정은 현지인한테도 힘든지 옆사람은 토를 해대기 일쑤였고, 창밖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 버스만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풍경이 몇 시간씩 펼쳐졌다.

30센티 버스 맨 뒷자리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아스팔트 도로가 이렇게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몰랐다. 아프리카에 와선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크게 다가온다. 버스를 타고 달리는 동안 밖을 내다보면 마을 사람들이 쭉 서서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다. 5초에 한 번씩 들리는 '차이나! 차이나!'는 덤. 전기도 없고 수돗물도 없다. 모얄레에 내릴 때쯤엔 이미 내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 밤엔 국경이 닫은 것 같아 급한 대로 근처에 숙소를 찾았는데,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보고는 간절하게 한국에 가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옆 동네 마실 가듯이 털레털레 걸어 케냐 국경을 넘었다. 버스나 기차로 넘어본 적은 있어도 직접 걸어서 국경을 넘은 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여기 사람들은 국경이 뭔지도 모르는 것처럼 캐주얼하게 지나간다. 그렇게 고생 끝에 케냐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는 건 수도 나이로비까지 내려가는 14시간 버스였다.

케냐 국경을 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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