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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10. 2020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아프리카 종단기 4. 케냐

선거일을 무사히 넘기는 법, 꿈에 그리던 사파리, 그리고 고아원 아이들

모로코에서 남아공까지 100일:
세계일주 200일 차에 모로코를 통해 도착한 아프리카 대륙.
300일 차에 남아공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딱 100일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나이로비, 케냐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아프기 시작했다. 새벽에야 나이로비에 도착하자 이 시간에 밖은 위험하다며 동이 틀 때까지 버스에서 못 나가게 했는데, 그때 버스 안에서 추위에 떨며 잠들어 감기가 걸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겁 많은 나는 말라리아에 걸려버린 게 아닐까 무서워서 온갖 오버를 했지만 약국에서 검사받아본 결과 한 줄이었다. 

마치 임신테스트기인 줄 알 것 같은 모양새


"선거일엔 전 국민이 일을 쉬기 때문에 사파리를 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냥 선거 끝날 때까지 여기서 쉬다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마사이마라 사파리를 가기 전, 잠깐 이틀만 머물고 가려고 했던 나이로비에는 일주일씩이나 있게 되었다. 너무나도 편했던 호스트 세실리아네서.


8월 초, 케냐가 대선을 앞두고 어수선해지자 겁먹은 나는 그전에 빠져나가기 위해 온갖 애를 썼는데, 에티오피아에서 밀린 일정 때문에 결국 선거 당일날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나이로비에 갇혀 버렸다.
 나중에는 재선거를 비롯하여 말이 많았지만, 정작 내가 있을 땐 그다지 위험한 느낌은 없었다. 폭동은 대부분 슬럼가에서만 일어났고, 길거리는 텅텅 비어 있어서 차가 막히지 않아 좋았다. 나야 여행자로서 문제가 없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투표가 상당한 스트레스였을지도 모른다. 세실리아와 그녀의 친구들은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린 후, 오후에나 투표를 마치고 들어왔으니. 왜 이렇게 일찍 가냐고 묻자 줄이 워낙 길어서 어쩔 수 없단다.

광장을 가득 메운 빨간 인파가 전부 선거 홍보 인원이다


마침 세실리아가 생일을 맞아 케냐인들의 생일파티도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만 나오면 모두가 일어나 춤을 추는 이 흥겨운 나라 사람들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하나같이 춤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듯했다.

세실리아의 인맥 덕분에 여러 인종이 어우러져 즐겼던 생일 파티 


세실리아의 가족들과 시내 관광도 종종 나섰다. 나이로비는 대도시인데도 국립공원과 많은 동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얼룩말이나 기린 등이 보일 정도로.

공원 앞에서 만난 블루파이어에그 몽키


세실리아가 일하는 날엔 그녀의 조카를 데리고 예전에 무한도전에 나왔던 코끼리 고아원에도 갔다. 아기코끼리가 이렇게 귀여운 존재인 줄 몰랐는데! 이곳은 야생에서 부모를 잃고 버려진 코끼리들을 데려와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키워주는 곳이었다. 50달러를 내고 입양도 가능하다. 

우유를 받아먹는 아가들도 있고 나혼자서 잘해요 뽐내는 아이들도 있다

마사이마라, 케냐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마사이마라 사파리. 탄자니아의 세렝게티와 같은 국립공원인데 국경을 기준으로 케냐 쪽은 마사이마라라고 부른다. 얼룩말의 섹시한 엉덩이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으며, 운 좋게 이 시기에 유명한 수천 마리의 누떼 대이동도 목격할 수 있었다. 등에 새를 얹고 공생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고, 사자 가족이 무리 지어 다니는 광경도, 냉혹한 약육강식의 현실도, 다양한 야생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사파리.



나쿠루, 케냐


나쿠루는 호수에 모인 홍학 떼가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던 홍학 떼보다, 다른 이유로 아주 기억에 많이 남는 도시였다.


나쿠루에서 한 카우치서핑은 고아원이었다. 호스트 윌미나는 마을의 고아들을 모아 8~10명 규모의 작은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 강간당해 18세에 아이를 낳게 된 소녀도 있었는데, 낮에 아기를 여기서 돌봐주는 동안 학교에 다니거나 옆 동네에 있는 집에 가서 살림을 하고 온다고 했다.


처음의 어색함을 깨고자 캘리그래피 때문에 가지고 다니던 색연필과 학용품 등을 꺼냈더니 역시나 다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더라. 나에게 스와힐리어와 케냐 노래를 가르쳐 주며 딱 붙어다니다가도, 비싼 캘리그래피 펜을 망가뜨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조금씩 눈치를 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시간


고아원에서 2박을 하고, 떠나기 전날 밤, 침대에 누워 하루를 돌아보다가 문득 내가 부끄러워졌다.


쓸데없는 물건은 무겁다고 나름대로 줄이고 줄여서 들고 온 가방인데, 그래도 아직 욕심을 다 내려놓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귀찮아서 이제 잘하지도 않는 캘리그래피 때문에 온갖 비싼 펜을 한 움큼 들고 다니면서, 싸구려 연필조차 별로 없는 아이들이 펜촉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꼴이라니.


아이들이 좋아하던 색연필 세트는 내가 4월 체코에서 구입한 거였는데, 물가 대비 꽤나 비싸긴 했으나 한 색연필에 색깔이 세 개씩 들어간 게 너무 예뻐서 아끼던 것이었다. 웃긴 건 산 당일날 풍경화 하나 그린 후로는 꺼내 쓴 적도 없었다.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큰맘 먹고 질러놓고는 아끼면서 쓰지도 않았다니. 그런 나보다는, 고아원 아이들이 이 색연필을 매일매일 즐겁게 써주는 게 더 가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떠나기 전, 색연필 하나하나에 각자의 이름을 한글과 영어로 적어서 (운명인지 마침 개수도 딱 맞았다) 나누어 주었더니 손에 꼭 쥐고 놓지를 않더라. 사실 마지막까지도 '나중에 아쉬우면 어떡하지' 싶어서 갈등했는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자 아쉬움이 비워낸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름이 적힌 커스텀 색연필로 탈바꿈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러 따라 나온 아이들은 다 떨어져 가는 신발을 신고 돌길을 걸었다. 오르막길이 힘들어 우는 서너 살 아기들은 고작 열 살 남짓밖에 안 된 아이들이 업어 들고 걷기를 계속했다.


한참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몇몇 아이들이 색연필을 입술에 자꾸 칠하는 게 보였다. 립스틱을 흉내 내는 것 같아서 웃기다가도 입술에 안 좋을 것 같아서 가방에 있는 틴트를 꺼내 주었다. 이것 역시, 화장할 정신도 없는 나보다는 이 아이들이 더 행복하게 써줄 것 같아서.


신나서 입술을 빨갛게 발라놓고는 본인 모습을 보지를 못해서 물웅덩이에 비춰 보는 모습이 또 눈에 밟혔다. 바로 손거울 열쇠고리를 떼서 내밀었다. 나는 어차피 화장품에 거울이 달려 있으니까. 한 번 주니까 또 주는 건 참 쉽더라. 그렇게 하나하나 내려놓을수록 홀가분한 마음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물욕이란 건, 나도 모르는 사이 사소한 물건에 더 집착하게 만들고 있었나 보다.

틴트를 바르고 신난 아이들과

키수무, 케냐


"케냐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부정부패가 많은 곳이야. 이 나라 정치는 썩었어. 지금 대통령은 죽일 놈이고 내가 어른이 되면 다 갈아엎을 거야."


이 말은 고작 8살 먹은 꼬마애가 나에게 던진 말.


적도가 가로지르는 케냐의 키수무는 내가 방문했던 8월 당시 역시 선거 때문에 불안정하다고 소문이 난 도시였다. 당선인의 반대파가 가장 큰 지지를 얻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 그 주변에서 영향력이 꽤 컸던 카우치서핑 호스트 데니스도 그 때문에 일이 엄청 바쁜 모양이었고, 그의 사촌 싸이러스가 대신 집에 남아서 나를 맞아 주었다.


같은 집에 있던 그의 조카들은 7-9살 정도 되는 꼬마애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 어른들의 세뇌 때문인진 몰라도 당시 반발이 많았던 케냐 대선에 대해 온갖 불만을 토로했고, 아프리카 모든 나라의 수도와 대통령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대견하다가도 저런 이슈에 관심이 없을 나이라는 걸 깨닫고는 조금 씁쓸해졌던.


아, 이 집이 정말 기억에 남는 이유는, 얼마나 시골에 있으면 방 안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닌다. 깜깜한 천장에 반짝- 반짝- 꼬물대는 것들이 보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키수무는 적도가 가로지르고 있는 마을이다. 지구의 딱 중간 지점에 내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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