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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08. 2020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아프리카 종단기 2. 튀니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가족과 함께

모로코에서 남아공까지 100일:
세계일주 200일 차에 모로코를 통해 도착한 아프리카 대륙.
300일 차에 남아공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딱 100일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튀니스, 튀니지


"나 벌써 너한테 튀니지 구경시켜 줄 계획을 다 짜 놨어!"


어떤 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딱 한 명의 사람으로 인해 완전히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그렇듯 내가 튀니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온전히 에이야 덕분이다.


사실 에이야와 펜팔을 하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한니발 전기를 좋아한 탓에 카르타고 유적을 보러 튀니지에 가고 싶었던 나는, 아는 정보가 전혀 없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위해 에이야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는 나를 절친한 친구마냥 반갑게 맞으며 내가 튀니지에 머무른 10일 내내 일정을 비워놨다. 정작 튀니지 사람인 본인도 관심 없는 카르타고에 내가 대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어리둥절하면서도.


세상 친절한 아랍인들 중에서도 가장 이유 없이 베풀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단연 에이야네 가족일 것이다. 수스에 사는 그녀는 나를 만나러 튀니지까지 와서 친척 집에서 지냈다. 에이야와 그녀의 사촌언니들과 함께, 나는 5일 내내 튀니스의 구석구석을 편히 보러 다닐 수 있었다. 


사촌언니들은 영어를 할 줄 몰라서 나와 소통이 쉽지 않은데도 매 식사마다 날 초대해서 배가 빵빵해지도록 먹여댔다. 내 접시와 컵이 빌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더 주면서 "eat! eat!"하고 웃으며 외쳤다. 


시디부사이드에서는 기념품 가게에서 쇼핑을 하길래 '이게 현지인들한테도 신기한가 보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웬걸, 집에 돌아가자 그때 산 자석부터 펜, 드럼, 접시까지 모조리 나한테 주는 게 아닌가. 살다 살다 손님한테 기념품까지 사주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내가 튀니지 다음엔 에티오피아엘 간다고 하자,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거길 가면 모기 때문에 살갗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며 모기퇴치제까지 챙겨주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내가 튀니지란 나라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노력이든 다 할 것 같았다. 모로코와 튀니지를 비교하다가 내가 튀니지를 좀 더 칭찬하면 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짓곤 했으니.


매일같이 부대끼며 같이 자고 먹고 놀다 보니 정말 내 진짜 가족이 된 것만 같았던 이들. 튀니지를 떠나는 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아쉬웠던 건 오롯이 에이야네 가족 때문이었다.

에이야와 함께, 시내 구경 중



수스, 튀니지


"솔직히 튀니지의 교통체증은 최악이야. 그리고 길거리도 너무 더러워.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본인들이 잘 먹고 잘 사니까 이런 게 개선이 필요한지 모르더라고."


"그래도 튀니지는 다른 주변국보다 훨씬 잘 사는 것 같은걸?"


"맞아. 초대 대통령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히잡을 강요하지 않는 등 여성 인권도 높였고, 전 국민이 무조건 교육을 받도록 의무화했거든. 다른 무슬림 국가들은 모든 가족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데, 튀니지는 한두 명만 낳아서 교육을 잘 시키자는 방향으로 바뀌었어. 사실 혁명 전까지 이곳은 정의나 규범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거든. 하지만 그 후로 튀니지는 훨씬 빠르게 현대화되었고 교육의 중요성이 증명된 거지."


에이야의 집이 수스에 있긴 했지만, 나는 카우치서핑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에 며칠만 따로 있다가 그녀의 집에 찾아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만난 호스트 아크람은 독일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프리랜서였다. 독일에 살아봐서 그런지 튀니지의 어지러운 질서에 불만이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보지 않아서 이런 게 문제인지도 모른다며 답답해했다. 하지만 혁명 이후 근대화가 빠르게 이루어진 조국의 모습에 굉장히 뿌듯해하기도 했다. 바닥에서 대륙 상위권으로 급속도로 성장한 튀니지의 역사는 마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아서 동질감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케이팝을 무진장 좋아해서 소녀시대의 Gee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알던 그의 여자친구 이름은 "몰카"였다. 나는 보통 카우치서핑 호스트에게 캘리그라피로 한글 이름을 써주곤 하는데, 몰카의 이름은 쓰기가 참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아크람이 데려가준 수스의 성벽 위에서


"마지막 밤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엄마와 동생이 널 기다리고 있어."


튀니지를 떠나기 이틀 전, 에이야네 집으로 다시 향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영어를 할 줄 모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었다. 내가 짧은 불어로 대답할 때마다 소녀처럼 좋아하시며.


어머니는 저녁으로 맛있는 전통 음식을 잔뜩 만드시더니 다른 사람들의 두 배가 되는 양을 내 접시에 담아 내미셨다. 식겁하여 이걸 어떻게 다 먹냐고 입을 떡 벌리는 나에게 시종일관 흐뭇하게 웃으며 오히려 음식을 더 덜어주시기까지. 


다음날 아침엔 내 손을 잡아끌며 시장에 가시더니 전통 의상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시길래 곧 무슨 명절인가 싶었는데, 예쁜 남색 원피스를 골라 나더러 입어보라고 재촉하셨다. 깜짝 놀라서 극구 사양의 의미로 손을 내저었는데, 막무가내로 우기시더니 결국 그 옷을 선물해주셨다. 내가 옷을 입고 나오자 또 그 소녀 같은 웃음을 띄우시면서.


튀니지는 이 따뜻한 가족 덕분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엄청난 풍경이나 세계 최고급 명소가 없어도 꼭 다시 방문해서 보답하고 싶은 곳.

에이야의 어머니가 마지막 날 사주신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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