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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07. 2020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아프리카 종단기 1. 모로코

매일매일이 새로웠던 국가에서 만난 사람들

모로코에서 남아공까지 100일:
세계일주 200일 차에 모로코를 통해 도착한 아프리카 대륙.
300일 차에 남아공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딱 100일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아프리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어릴 적부터 아프리카에 꼭 가보고 싶었다. 굳이 남들이 만류하는 곳에 가려는 이유를 찾으라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딱 한 가지를 꼽자면 미디어나 소문으로 듣는 소식 말고, 직접 내가 그곳의 현실을 보고 싶었다. 본인의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는 정확히 어떤지 절대 알 수 없으니까. 고등학교 때 몽골에 환경 봉사를 가서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건, 그전까지 실감하지 못했던 물 부족 현상과 사막화의 심각성이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 대한 모든 흔한 편견들을 뒤로하고, 진실을 마주해보고 싶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는 말이지만, 여기는 창문 밖으로 사자들이 뛰어노는 곳도, 인터넷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곳도, 일 년 내내 온 대륙이 더위에 고생하는 곳도 아니다. 내가 정말 두려웠던 건 저런 문제들이 아닌, 현지 사람들과의 접촉이었다. 굉장히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이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대다수의 시간을 동양인들과 보냈다. 대학교에 동양인 비율이 엄청나게 높은 것도 한몫했겠으나, 굳이 억지로 타 인종들과 친해지려는 노력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백인들은 어릴 적 영국에 잠깐 살면서 그러려니 대할 수 있게 됐는데, 흑인은 주변에 없기도 없었고 내가 억지로 찾아 나설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무서웠다.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게. 한국에서는 외국인을 잘 볼 수 없다는 같잖은 핑계로 애써 이런 어색함을 합리화하기만 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상당히 개방적으로 바뀌었다고 자부했으나, 내가 과연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아무런 편견이나 경계 없이 마주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런 스스로를 극복하고 싶었다. 현지인들과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대화하고 싶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고, 나와는 다른 삶이라 해도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아프리카 종단이라는 건, 지금껏 해왔던 유럽이나 아시아 여행과는 완전히 다른 도전이었다. 2017년 7월, 나는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건너감으로써 아프리카에 첫 발을 디뎠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잔지바르 바다



탕헤르, 모로코


“너는 저예산으로 장기여행 중이잖아. 그러니까 여기서는 돈을 쓰지 마.”


탕헤르 총지출 0원. 아니, 애초에 모로코 화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했다. 절대 돈을 한 푼도 못 내게 했던 호스트 마티아스 덕분에. 스페인에서 페리를 타고 들어가자 내 이름이 크게 적힌 피켓을 들고선 한 시간이나 일찍 마중을 나와있던 그는, 마지막엔 내 다음 목적지인 쉐프샤우엔까지 4시간을 꼬박 운전해서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모로코는 내 인생 최초의 이슬람 국가였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호스트들에게 미리 연락해 "나 반바지 입으면 안 되겠지? 뭐 입어야 돼?"하고 걱정 어린 질문들을 해대곤 했다. 물론 막상 도착해 보니 이곳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여 크게 문제는 안 됐지만... 어쨌든 이슬람 문화 아래에 있는 나라인 만큼, 여러 가지로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익숙해져 버린 유럽에서 슬럼프를 겪던 나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즐거운 곳이었다. 


내가 모로코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은 마침 라마단이 다 끝나가는 주말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낮 내내 굶은 사람들이 유난히 난폭할 때라고 한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점도 카페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맥주를 마셨다. 무슬림 국가에 난생처음 와보는 나에게, 독일인인 그는 외국인과 현지인의 시선을 적당히 섞어 적응을 도와주었다.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아 자칫 지루할 수 있었던 라마단의 마지막. 우리는 탕헤르의 완벽한 위치 덕분에 하루는 대서양에서, 하루는 지중해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다시 시내로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탕헤르의 무시무시한 교통체증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비키겠지-"하는 마인드로 다들 막무가내로 운전한다. 꽉 막힌 차들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비집고 다니는데, 마티아스가 클락션을 울리자 어떤 사람이 "뻐큐-"하고 지나가기도. 마티아스와 웬 택시기사가 시비가 붙어서 티익스프레스급으로 경주하는 황천길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는 험한 운전으로는 세계 1위를 기록하는 모로코의 자동차들 사이로 더 격하게(!) 운전하는 독일인의 자부심을 보이며 나를 온갖 관광지에 빠르게 데려다주었다. 아래 사진에 나온, 대중교통으론 절대 가지 못할 아프리카 대륙 모양의 헤라클레스 동굴까지도.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헤라클레스가 11번째 과업을 달성할 때 머물렀다는 동굴



쉐프샤우엔, 모로코


“너는 왜 모로코인이 ‘존’이라는 유럽식 이름을 갖게 되었어?”


“내 본명은 오사마야.”


“아…”


“멍청한 사람들이 오사마 빈 라덴 때문에 모든 오사마들을 다 테러리스트 취급하지 뭐야.”


선입견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 준 모로코.


블루시티 쉐프샤우엔의 호스트 존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멋들어진 전통 가옥에서 에어비엔비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1층은 에어비엔비로 내주고 2층에는 카우치서핑 손님을 머무르게 해주는 식이었다.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내가 알던 많은 모로코 남자들과는 달리 조국에서 보내는 그의 삶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도시 전경을 보러 함께 올라가서 노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나에게도 사진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본인도 DSLR을 쓸 줄 안다며.


내 니콘 카메라를 넘겨주자 그는 뻘쭘하게 포즈를 잡고 있는 내 앞에서 한참 이것저것 만져대더니, "역시 난 캐논이 더 좋아."라는 말과 함께 툴툴대며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쉐프샤우엔 전경 앞에서, 존
그리고 그 후에 카메라에서 발견한 사진. 이건 니콘 캐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메크네스, 모로코


"나, 쿠스쿠스를 먹어보고 싶어!"


"앗, 정말? 사실 우리 엄마가 만든 쿠스쿠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거든. 엄마가 안 그래도 널 집으로 초대하라고 했는데, 처음 만나는 남자가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면 불안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여자 입장에선 낯선 곳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아니까."


메르주가에 가기 위해 잠깐 들른 모로코의 역사 깊은 도시 메크네스. 이곳에서 만난 함자는 사실 카우치서핑 호스트는 아니었다.


나에겐 전부터 오스만이라는 모로코인 펜팔이 한 명 있었는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면서도 내가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이런저런 꿀팁과 도움을 많이 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는 내가 메르주가에 사하라 사막을 보러 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는 같이 가자며 직장에 휴가를 냈고,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로컬 투어 일정을 잡아주었다.


이 투어가 픽업을 메크네스로 오기로 하는 바람에, 나는 메크네스에서 하루 머물게 된 것. 오스만은 혼자 다닐 내 걱정에, 친구들을 통해 나에게 도시 구경을 시켜줄 사람을 찾아주었다. 메크네스에 사는 오스만의 친구는 출장을 간 상태였지만, 그 친구의 친구 함자가 흔쾌히 승낙하여 나온 것이다. 오스만과는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인데도.


모로코를 다니며 느낀 점은, 현지인들이 과할 정도로 친절하다는 것이다. 함자는 그 날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음료수 한 잔조차 계산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손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저런 특이한 전통 음식은 모조리 다 사주면서. 집에 초대하면 내가 의심할까 봐 말하지 않는 소소한 배려까지. 그의 어머니와 누나는 결국 나를 보고 싶다며 시내까지 차를 타고 나와 인사를 나누고는, 다음번엔 꼭 집에 놀러 오라며 신신당부하고는 돌아갔다.


밤늦게 열린 전통 공연까지 본 후, 그는 픽업 장소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자정이 넘어서 픽업이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늦은 시간까지 내 옆을 지켜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미디어가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그려내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편견이 억울하다는 하소연부터, 태양의 "눈코입"을 즐겨 듣는다는 사소한 취미까지.


픽업 차량이 도착하여 오스만이 내리자, 그는 처음 본 오스만과 몇 년 지기 친구마냥 찐하게 인사하고는, 나보고 다음엔 더 길게 놀러 오라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땐 꼭 어머니의 쿠스쿠스를 먹어보게 해 주겠다고. 

전통 공연을 구경하며, 함자와 셀카



메르주가, 모로코


"나는 외국인들이 내 아름다운 조국을 최대한 많이 즐기고 갔으면 좋겠어. 너에게 최고의 사하라 사막 추억을 남겨줄게."


오스만과 함께 떠난 사하라 투어는 정말이지 로컬 그 자체였다. 미니밴에 탄 10명 중 나를 제외한 9명이 죄다 모로코인이었기 때문.


오스만 역시 다른 모로코 친구들이 그랬듯 사막용 터번을 사주고 낙타우유를 비롯한 각종 전통 음식을 먹여주기 바빴다. 나머지 모로코인들도 아랍어로 실컷 떠들다가도 서툰 영어로 이 쪼끄만 동양 여자애를 챙겨주곤 했다. 그중에서도 영어를 제일 못해 늘 "Sky!" 하며 내 이름을 무작정 부르고 나선 손짓 발짓으로 일관하던 모하메드는, 괜찮다는 내 말에도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무거운 배낭을 뺏어가 들어주던 고마운 친구였다.


투어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기념품샵에 들렀는데, 180cm가 넘는 모로코 남자들 넷이 로즈워터와 각종 천연 화장품 앞에서 기웃거리며 골라대는 모습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스만은 마지막에 화산재 같은 게 들어있는 작은 병과 이쑤시개 같은 막대기를 사 오더니 전통 아이라이너니까 써보라며 내 주머니에 쓱 넣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오스만과 탄 낙타



페스, 모로코


"예전에 한국인 손님들이 선물을 주고 가서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아."


페스의 카우치 호스트 바틀은 가족과 함께 모로코식 게스트하우스인 '리야드'를 운영 중인 내 또래 여자였다. 그녀의 리야드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각종 언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할 줄 아는 똘똘함과 함께 손님들에게 온갖 장난을 쳐대는 맹랑함도 갖고 있었다. (커플 손님 중 남자한테 여자친구 빼앗을 거라고 경고하는 등...) 그러다가도 아침에는 대걸레를 들고 엄청난 힘으로 청소를 해대는 모습이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바툴은 나를 데리고 도시 외곽에 위치한 그녀의 이모네 집과 할머니네 집을 방문했다. 페스 한가운데에는 짧은 영어로 외국인에게 인사를 던져대는 꼬마들이 참 많았는데, 이쪽 빈민가에선 오히려 아이들이 나를 보자 경계하며 주춤주춤 물러나길래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조카들 역시 남동생과는 다르게 나한테 좀처럼 다가오려고 하질 않더라. 

페스의 명물 가죽 염색공장



마라케시, 모로코


"오토바이를 처음 타 본다고? 이것만큼 편한 게 없는데!"


붉은 도시로 알려진 마라케시는, 나한테는 오토바이의 도시로 더 각인이 된 곳이다.


날 기차역에 데리러 오토바이를 타고 온 호스트 자카리아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오토바이에 타볼 수 있었다. 잔뜩 겁먹은 날 보며 그는 천천히 가겠다며 호탕하게 웃더니 자동차 사이로 씽씽 달려댔다.


메크네스에서도 느꼈지만 모로코인들의 의리란 참으로 대단한 게, 친구에게 처음 보는 외국인 케어까지 맡겨버린다. 자카리아가 일하러 간 사이엔 그의 친구 야야가 대신 시내 구경을 시켜줬다. 야야 역시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바람에 나는 이곳의 교통수단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세계여행 중 오토바이를 탈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이켜 보면 마라케시에서 미리 적응한 게 참 다행이었다.

야야의 오토바이를 타고



타멜랄트, 모로코


"베르베르인들은 뼛속까지 순진한 사람들이야. 아랍인들한테 영토를 다 빼앗겼는데도 그 종교까지 받아들여 줬거든. 나는 아랍인들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모로코 여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한테까지 적용되는 게 너무 싫어."


사막 쪽에 위치한 마을들엔 모로코의 토착 민족인 베르베르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배계층이 아니기 때문에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사이에는 종종 마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아랍인과 섞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핏줄을 유지하고 전통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그중 하나인 타멜랄트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프로필만 보고 무턱대고 찾아갔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소박한 진짜 삶을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러 갔다가 표가 다 팔렸다는 말에 좌절하고, 합승택시를 구해 두 번 갈아타가며 개고생을 했다. 택시가 왠지 더 편할 것 같지만 에어컨 따위 틀지 않는 모로코의 택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우나... 게다가 첫 택시에선 옆에 아줌마가 안고 탄 아기가 토를 하질 않나, 두 번째 택시에선 때를 긁어내 손가락으로 튕겨대는 더러운 아저씨가 옆에 앉질 않나... 참을 인 수백 번 그어가며 겨우겨우 도착한 타멜랄트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따스한 곳이었다.


아랍인이 아닌 모로코의 원주민 베르베르인들이 160가구 모여 사는 마을. 집들은 거대한 대자연에 둘러싸여 있고 온갖 과일과 채소를 직접 재배하여 먹는 곳. 지나가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온종일 강가에서 다이빙을 하는 곳. 밤에는 개구리며 귀뚜라미며 개, 새(욕 아님), 여우가 목청껏 울부짖고 옥상에서 맑게 개인 밤하늘을 보며 잠들 수 있는 곳. 신호는 안 터져도 와이파이는 잡히고 일주일에 하루는 반나절 전기가 끊기는 곳. 사막답게 삐죽삐죽 가시 돋친 식물들을 요리조리 피해 삼선 슬리퍼 하이킹을 하느라 몸이 남아나질 않았지만, 도시의 바쁜 일상과는 확연히 반대되는 시골의 삶을 발견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호스트 칼리드는 그야말로 자연인이었다. 매일같이 계곡에서 수영과 다이빙을 하는 건 기본이고, 강가에서 불을 피워 차를 끓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모아 간이 지붕을 만든 후 그 아래에서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여동생이 선물해준 전통의상을 입고 그와 함께 며칠 내내 자연을 즐겼다.

칼리드와 강가에서 차 끓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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