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백수 일기 #1
# 프롤로그 ―
백수 생활 5개월 차. 퇴사 전에는 회사만 그만두면 모든 게 다 이뤄질 것 같았다. 마치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퇴사'라는 키만 쥐면 내 앞길이 만사형통 탄탄대로일 줄 알았단 말이지.
하지만 현실은 백수는 그저 백수일뿐. 나의 퇴사가 성공적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퇴사한 걸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다. 퇴사는 내가 인생에서 내린 결정 중 가장 잘한 일 TOP 5 안에 드는 일이니까. 이 글은 어제도 백수, 오늘도 백수, 왠지 내일도 백수일 것 같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쓰는 소소한 자아 반성기, 뭐 그런 거다.
#1. 왜 퇴사했나요? ―
퇴사를 결심하는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본질적으론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가 아닐까. 내가 퇴사를 결심한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이런저런 악재가 겹치던 그때. 자세한 이야기는 털어놓을 수 없지만 그때의 난 매일매일이 가파른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하늘엔 금방이라도 벼락이 칠듯한 먹구름이 가득 껴있고 발밑에는 날 집어삼키고도 남을 파도가 찰싹찰싹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나를 위협하는 절벽.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생각. '회사 가기 싫다'.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맡기며 하는 생각. '집에 가고 싶다'. 출근 도장을 찍고 사무실 의자에 앉으며 하는 생각. '퇴근하고 싶다'. 심지어 집에 돌아가는 길마저 '아 내일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나에게 회사는 모든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의 원인,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먼지 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매일 아침 여섯 시 반, 억지로 눈을 떠 출근을 한다. 생명수와도 같은 카페인으로 억지로 활기를 불어넣어가며 오전 내내 정신없이 일하다 삼각김밥으로 대충 점심을 때운다. 오후 다섯 시. 퇴근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온다. 망했다. 오늘도 정시 퇴근하긴 글렀구나. 밤 아홉 시.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하는데 울컥 눈물이 난다. '이놈의 회사 내가 진짜 이번 달엔 때려치워야지'. 겨우 일을 마무리짓고 진이 다 빠진 채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이미 몸은 천근만근인데 세상이 넌 엿이나 먹으라는 것인지 자리도 나지 않는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밤늦게 도착한 집에서 캔맥주로 저녁을 대신한다. 흘러가는 하루가 아쉬워 새벽까지 핸드폰을 붙들고 의미 없는 글을 읽다 겨우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 날, 지옥 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길 몇 달, 우울증이 왔다. 처음엔 그저 힘든 것이라 생각했다. 일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어딘가 스스로 점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을 놓쳐서 회사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느린 걸음으로 앞길을 막는 행인을 보면 짜증이 솟구쳤다. 무뚝뚝한 편의점 알바생은 무능력한 나에게만 쌀쌀맞은 것 같았고 길을 가다 웃는 사람이 있으면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유 없는 짜증이 늘고 부모님이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나중엔 온종일 말을 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나도 모르게 흘러넘치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펑펑 울기를 여러 번.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에 올라온 우울증 테스트를 해봤다. 결과는 '병원에 가서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볼 것'.
이게 뭔가 싶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돈을 벌려고 했던 건데.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함께 웃고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도대체 나는 뭘 위해서 날 갉아먹고 있는 거지. 이 일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건가? 1년, 2년 후 지금을 돌아보면 그래도 꾹 잘 참았다고 할까? 나 진짜 행복해질까?
그래서 결심했다. 퇴사하기로. 일단 살아야겠다 싶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퇴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냥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그 수단이 되려 내 인생을 망쳐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아마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겪는 슬프고도 짜증 나는 상황이겠지.
그러니 제발 퇴사하는 이들에게 왜 퇴사하냐고 묻지 말아 주세요. 왜겠어요? 그냥 '많이 힘들었지' 하고 술잔 짠 한번 부딪혀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