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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그렛 Feb 02. 2019

간절한데 간절하지 않아요

늦깎이 인문계열 취준생의 고군분투 생존기 02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쓰기 시작한 건 10월이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달까. <27살이 세 달밖에 안 남았어! 28살이 되기 전에 취직해야 돼! 28살은 누가 봐도 백수란 말이 커버가 안 되잖아!> 쥐뿔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때의 나는, 28살이 되기 전에는 직장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 알바든 대외활동이든 승률 90프로 이상을 자랑했으니까. 그렇다. 나는 사회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취직은 알바도 아니고, 대외활동도 아니었다.




여행사 직원보다는 여행 작가가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람이 이때까지 보고 들은 걸 쉽게 버리지는 못하는 지라, 잠시나마 관광가이드 교육까지 들었던 나는 여행사 쪽으로 취직의 가닥을 잡았다. 그러던 중 업무도, 연봉도 마음에 드는 공고를 발견한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곳은 여행 수필을 제출해야 하는 곳이었다. 유럽여행을 갔을 때 블로그에 매일 같이 하루를 기록했던 터라, 수필이야 형식만 조금 다듬으면 되는 상황. 나는 그렇게 운이 좋게도, 처음 지원한 곳에서 면접까지 보게 된다.


다대다 면접, 내 옆 사람은 여행작가 과정을 수료했다고 한다. 오, 그런 게 있었나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면접관의 말. <여행작가는 ㅇㅇ씨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정해진 사회의 정해진 삶의 인간, 나는 지독히도 성실해서 지독히 공허한 사람이었다.” 이 부분 무슨 생각으로 쓴 거예요?>


그리고 영어 면접이 바로 이어진다. 맙소사. 생각지도 못한 상황 면접이다. [고객들이 더 좋은 방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한다. 호텔 직원과 대화해보시오] 그런데 아뿔싸, 갑자기 available이 생각이 안 난다. 토익 875점, 오픽 IH 있어봤자 다 소용이 없다. 영어회화 울렁증 말기는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자한당이랑 일하게 되면 그만둘 거예요?


구인구직사이트에 자유 형식의 이력서를 올려놓았다. 회사가 요구하는 이력서에는 경력 칸만 존재할 뿐, 내가 살면서 쌓아온 대외활동이나 아르바이트를 써넣을 칸이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 한 스타트업 회사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직무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 사회적 게임을 개발 중이라고 한다.


”졸업하고 2년 동안 경력이 없네요. 뭐했어요?”

“시민단체 인턴도 하고, 디자인 툴도 좀 배우고, 가이드 교육도 받고, 여러 가지 분야에서 방황을 좀 했어요.”

“만약에 우리 회사가 자한당이랑 일하게 됐어요. 그럼 때려치울 거예요?”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과 일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이상 열심히 업무에 임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자한당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아, 면접 망했구나 싶었다. 누가 사기업 면접 보러 가서는 절대 시민단체 얘기 꺼내지도 말랬는데. 그러나 면접 결과는 합격. 그나마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주워들은 게 많으니 이후의 대화에서 술술 내 주장을 잘 얘기했기 때문이겠지. 운이 좋았던 건 질문하는 주제가 다 내가 아는 내용이었다는 거. 기초적으로 디자인 툴을 다룰 줄 아는 것도 한 몫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며칠의 고민 끝에 결국 가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제 한번 직무를 정하면 최소 몇 년은 그 직무 쪽으로 계속 일을 해야 할 텐데, 게임에 관심도 없던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른 기회는 있겠지.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자.




지금 ㅇㅇ씨에게 세상의 모든 직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럼 뭐할 거예요?



정말 가고 싶던 여행사에 떨어진 후, 한 달 동안은 자소서도 쓰지 않고 그냥 우울하게 지냈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무턱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때의 나는 서류에서 떨어지는 것, 최종면접에서 떨어지는 것은 취준생에게 자고 일어나는 것만큼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걸 몰랐다.


이후 한 크라우드 펀딩 회사에 지원하게 된다. 알바를 하며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도 리워드형 펀딩에는 꾸준히 소액투자를 했던 터라. 막연히 재미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재미로 덤비는 사람을 붙여준다면 회사가 왜 회사겠는가. 재미로 하는 거면 내가 돈을 내야지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ㅇㅇ씨에게 세상의 모든 직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럼 뭐할 거예요?”

그래도 면접이니까. 나는 직무와 관련된 얘기를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PM으로서 어쩌고저쩌고.

“음... 그러면 좀 실망인데? 나는 말레이시아 가서 대사 할 건데.”

이 부분에서 솔직히 좀 울컥했다. 친구랑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솔직히 얘기를 해요. 모든 직업을 할 수 있다면 내 꿈은 건물주예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사장.


2시간이나 이어진 면접 끝에 결과는 불합격. 마지막으로 해주신 말은 아직까지도 토씨 하나까지 기억에 남는다. <ㅇㅇ씨는 아직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사람 같아요. 활동이나 아르바이트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히 적어주셔서 사실은 좀 궁금했었거든요. 어떤 사람인지.>




우리 회사도 일하다가 때려치우고 여행 갈 거예요?


작은 인터넷 언론사의 사무직에 지원을 했다. 나는 명예욕도, 재물욕도, 권력욕도 없는 사람이다. 어떤 회사든 빨리 들어가서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없다면 그냥 아무거나 하자.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흘러가다 보면 어떻게든 먹고살겠지.


“졸업하고 2년 동안 경력이 없는데 뭐했어요?”

단골 질문 또 등장이다. 머릿속에서는 경보가 울리기 시작한다. 안돼. 사실대로 말하면.

“잠깐씩 아르바이트하면서 여행 다녔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모르겠어서 방황을 좀 했어요.”

결국 절반은 사실을 말했다.

“뭐 장점에 끈기가 있다 성실하다 그런거 적어놨는데, 이력서 보니까 동의를 못하겠는데? 그럼 우리 회사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여행 갈 거예요?”

말문이 막힌다. 여행 다닐 만큼 다닌 것 같고요. 이젠 나이 먹어서 때려치우려고 해도 못 때려치워요. 2주 안에 연락 준다던 회사는 결국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간절한데 간절하지 않아요


또다시 원점이다. 난 네 달 동안 열다섯 곳에 서류를 냈고, 네 곳에 면접을 보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직무조차 정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위의 네 곳만 해도 중구난방이 아닌가. 나는 취직에는 ‘간절’했지만 직무에는 간절하지 ‘않았다’. 내가 이 일에 열정이 있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목적이 단지 취직이었으니 그 어떤 회사가 날 반겼으랴.


취준에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직무 선택이라는데, 들쭉날쭉인 직무 덕분에 지원할 때마다 자소서를 처음부터 다시 쓰는 소모전을 겪어야 했고, 나조차도 진이 빠졌다.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온갖 직무로 자소서를 열몇 개 쓸게 아니라, 그 시간에 직무를 두세 개로 확실히 정해서 대여섯 개 써보는 게 오히려 나에겐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시작이다. 직무 선택. 하고 싶은 게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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