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과 소통하기
몇 달 동안 고민하던 끝에 첫째군 학원을 하나 더 등록하기로 했다. 이미 적지 않은 일정이다 보니 한 과목 더 추가하는 것을 선뜻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주말 오후는 온전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춘기씨의 주장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본인도 어느 정도 필요성을 느끼게 되자 결국 우리는 아침에 한시간 더 일찍 일어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는 폭풍같은 일정은 토요일 오후까지 쉼없이 이어진다. 아직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일정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중 선택이 가능했기에 내심 조금 더 여유있는 일요일 일정을 선택해주길 바랬지만 몰아서 얼른 해치워버리고 오후는 쉬겠다는 그 마음을 알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나에게도 주말은 소중한데. 6시 알람을 세개씩 맞춰놓고 깨지 않아도 되는 두 번의 아침. 하지만 그 중 한 번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일요일 하루만 늦잠을 즐기기로 했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5시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준비하시는 소리에 나도 항상 일찍 일어났다. 할머니는 그렇게 새벽부터 일어나서 잡곡밥을 지으시고, 커다란 김을 한 장 한 장 파랗게 구워주셨다. 고 옆에 비몽사몽 쭈그리고 앉아서 얻어먹던 갓 구운 바삭한 김의 고소함. 할아버지는 아침 신문을 천천히 읽으신 후 온갖 초록색 야채들을 커다란 쟁반에 담아서 녹즙을 만들어 주셨다. 끔찍한 케일주스. 지금은 어디서 돈내고 사먹기도 힘든 그 귀한 건강식을 나는 울면서 꿀꺽꿀꺽 억지로 삼켰다. 내가 어른이 되면 결명자차와 케일주스, 현미밥은 절대로 먹지 않으리라.
할아버지는 100세가 얼마 남지 않으신 나이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도 아픈 곳 하나 없이 그저 기력이 쇠해지셔서 짧게 누워계시다가 편히 가셨다. 대충 먹고 대충 살고 있는 나도 나이들어 그렇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그나마 아직까지 크게 아픈데 없이 건강한 건 어린시절 두 분께서 해주신 건강식을 먹고 자랐기 때문일 거라며.
7시 20분. 서둘러 샌드위치를 들고 방에 들어갔더니 이녀석, 안먹겠다고 한다. 나만큼이나 아침밥이 소중한 녀석인데. 보아하니 숙제를 다 못하신 것 같다. 이제서야 책상에 앉아서 급하게 끄쩍거리고 있다. 20분도 안남았는데. 너 지금 나가면 2시까지 아무것도 못 먹을텐데 진짜 괜찮겠냐, 갖다줄테니 먹으면서 해라 해도 꿈쩍도 안한다. 많이 남았나보다. 어제 둘째군한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둘이 하루종일 숙제 안하고 놀았던게 분명하다. 그녀석도 숙제가 제대로 안되어 있어 눈을 치켜뜨니, 형아가 숙제는 저녁에 하고 놀자고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엄마가 오면 노는 꼴 못보니까, 이녀석들은 그렇게 낮시간은 실컷 즐기고 저녁에 하기로 했나보다. 아무리 그래도 할 건 하고 놀아야지. 방학 내내,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시간이 남고 남는데! 어제 동생이 숙제를 안한 것에 대한 괘씸함까지 추가되서 분노게이지가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싸우지 말자. 애써 모른척 하며 조용히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화분을 하나 하나 꺼내서 물을 주기 시작했더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새로 돋아난 연두색 잎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몇 개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물주기가 다 끝날 때 까지도 이녀석은 꿈쩍을 안한다. 답답해서 몰래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여전히 숙제중이다. 이제 나가야 되는데..
나는 약속에 늦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게다가 학원, 시간당 단가를 주르륵 계산해서 늦는 시간만큼의 손해가 머리속에 바로 딱 떠올라버린다. 10분 늦으면 이게 대체 얼마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흡흡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얘기했다.
엄마 먼저 내려가서 시동 걸고 있을께
나는 웬만하면 아무리 늦어도 가족들보다 먼저 차에 내려가지 않는다. 눈앞에 보여야 빨리빨리 다그쳐서 몰고 내려갈텐데 내가 먼저 내려가 있으면 대체 언제 나올지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싸우지 않기 위해' 먼저 내려가는 편을 택했다. 차에 가서 시동을 걸고 차를 따듯하게 데우기 시작한 후 차가운 기온에 유리에 낀 하얀 성에들을 없애고, 할일이 끝나고 나니 또다시 시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재촉하지 말자. 전화하지 말자. 차분하게 기다리자.
1분이 10분 같다. 45분이 되면 전화해야지. 48분까지만 참아보자. 조급증을 꾹꾹 눌러놓으며 나 자신과의 길고 긴 싸움을 했다. 아 화가 난다. 이러다가 정말로 늦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안달은 '늦을까봐' 에 대한 안달이고 지금부터가 진짜 지각이다.) 결국 전화를 했다. 그래도 화는 내지 않았다. 말을 길게 하지 말자.
"왜 안내려오니?"
"옷 찾느라 좀 늦었어, 바로 갈께"
그래 역시 내가 있었어야 했어. 옷을 꺼내주고 올 걸. 그 시간을 단축했어야 했는데. 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분은 그러고도 무려 5분이나 더 지난 후에 내려왔고, 나는 출발해서 도착할때 까지 입을 꼭 다물고 갔다. 입을 열면 잔소리 랩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서.
이분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귀마개를 장착하고 내려왔을 거다. 엄마가 얼마나 화를 낼지 알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녀석은 동그란 눈을 하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내렸다.
잘 가라는 말도 없이 그렇게 보내고 나니 한 편으로는 소심하게 화를 표현한 것 같아 마음이 살짝 후련해 지기도 했으나, 곧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애 아침밥도 안먹이고 잘 가라고 인사도 안해주고 그렇게 못되게 굴고 마음이 편하냐.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집에 와서 일단 혼자 아침을 먹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과제 수행률 50%’
악!! 아오 이녀석. 역시 내 이럴줄.. 대체 얼마나 안해놨길래 50% 밖에 안된거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과 달리 손가락은 예쁘게 죄송한 마음과 궁색한 변명으로 답장을 한다. 내 변명도 아닌 저녀석 변명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외의 답장.
‘여러 번 수정하다가 남은거라서 그래요, 진짜 어려운 과제였을 거에요, 남아서 좀 하고 갈께요.'
아.. 대략 1분간.. 미친듯이 끓어올랐던 냄비가 한 순간에 진정되었다. 그렇구나, 니가 마냥 안하고 논 건 아니었겠지. 내가 막 화부터 냈으면 오늘 너랑 나는 한바탕 또 전쟁을 했겠지.
엄마는 왜 알지도 못하면서 화부터 내고 엄마 얘기만 해?
라는 것은 우리 아들의 단골 멘트다. '야 내가 신도 아니고 니 마음속을 들여다보는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 아냐! 그럼 니가 행동을 똑바로 하면 되잖아!!' 라고 되받아치며 시작되는, 안봐도 불 보듯 뻔한 싸움. 문 쾅 닫고 끝나는 결론. 오늘 심호흡 여러번 하면서 잘 참아낸 보람이 있구나!
그녀석이 저녁때 와서 이야기했다. '엄마, 나 어제 학원가기 전에 저녁 먹은 이후로 무려 21시간이나 굶었어'. 그래 내가 구구절절 잔소리하지 않아도 니가 느낀 바가 있겠지. 미리미리 할 일을 해놓고 쉬면 얼마나 편한지.
머리속에서는 되지만 마음속에서는 잘 되지 않는 뻔하고도 어려운 마법의 주문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오늘 하루를 시작해 본다.
미리 짐작하지 말자. 일단 끝까지 들어보자. 아이를 믿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