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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one Sep 22. 2023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바라보며

어떠한 형태도 가족이다.

일본에 온 지 6년이 지났다.

처음 일, 이 년과 달리 일본 체류를 지속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올해 여름은 우연히 국적도, 직업도, 피부색도 다른 여러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겼다.


먼저, 한국에서 오신 선교사님 가족이다.

정년퇴직보다는 조금 이른 나이에 선교를 위해 일본 도쿄로 온 이 가족은 엄마, 아빠, 장녀, 차녀 이렇게 넷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녀는 한국에서 계속 거주하고 있으며 엄마, 아빠 그리고 차녀 이렇게 셋만 도쿄에서 살고 있다. 선교사라는 직업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에서 여러 사역들을 하는 이 가족을 만난 것은 작년 여름즈음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일본에 온 입장에서는 부모와 함께 오는 선택지가 주어진 선교사님 가정의 차녀가 부러웠다. 올해 초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선교사님 댁을 방문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좁디좁은 기숙사 혹은 원룸에서의 생활을 계속했던 나에게 가족이 생활하는 넓은 거실과 식탁이 있는 가정집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탓일까,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 커다란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 학교를 다녀온 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럽고 행복해 보였다. 나의 부러움을 증폭시킨 것은 지난달 교회에서 저녁식사 전에 선교사님 부부, 차녀와 함께 넷이서 피아노를 치며 찬양을 부르던 시간이었다. 작은 일본 교회에서 선교사님 가족과 한국어로 같이 찬양을 부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나도 이 가족처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같이 찬양을 할 수 있는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둘째, 호주 친구와 일본에 놀러 오신 호주 친구 아버님과 그 파트너 가족이다.

나보다 세 살 어린 호주 친구 M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일을 하고 있다. 거의 10년을 일본에서 지냈고 얼마 전에는 영주권을 땄다. M의 부모님은 어릴 적에 이혼을 하셨다. 그래서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엄마 집, 아빠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현재 각각 새로운 파트너와 지내고 계신다. M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다.


올해 여름에는 M의 아버지와 그 파트너(서류상의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함께한 지 오래되어 사실혼 관계에 있어, "여자친구"라고 하기에도 "아내"라고 하기에도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 파트너라고 하겠다)가 약 3주간 일본으로 여행을 왔다. 일본 곳곳을 여행하느라 도쿄에 머무는 시간은 적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도쿄에 있는 시간 동안 아들이 어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지 만나보고 싶다며 친구들을 소개해주기를 원하셨다. 마침 시간이 맞았던 나는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한국인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서양의 이혼가정의 자녀들이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의 새로운 파트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살아가는지 직접 보게 되는 드문 기회였다. M의 아버지의 파트너는 M을 아들과 같이 반겨주시고 많은 것들을 물어보셨다. 일본 생활은 어떤지, 직장은 어떤지, 요즘 데이트 중인 상대는 어떤지 등등. 엄마, 아빠가 나에게 물어보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질문들을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리고 파트너가 함께한 자리에서 M과 아버지가 나누는 어머니에 대한 대화에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나의 부모로부터 경험한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또 M의 친구라는 이유 만으로 식사자리에 초대받고 자식 대하듯 대해 주시는 두 분을 보면서, 한국이든 호주든 부모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셋째, 일 년 전 하늘나라에 가버린 일본인 친구와 그 가족이다.

사실 이 글을 써 내려가게 된 직접적 동기가 된 만남은 이 가족과의 만남이다.


대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 Y가 있다. Y는 나보다 3살 어린 친구인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서 일본인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아이였다. 외적인 부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에밀 아자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Y는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았고 나는 박사과정에 진학했기 때문에, Y가 직장에 들어간 2021년부터는 자주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직접 얼굴을 보았던 것은 2021년 연말이었다. 새해가 되면 일 년 동안 지방으로 전근을 가게 된다는 소식에 연말에 만나 떡볶이를 먹고 차를 마셨다.


그랬던 Y는 지방에서 숨을 거뒀다. 전화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아니 충격적이었지만 예감하고 있었다. 석사과정을 하는 2년간, Y와의 대화에서 Y의 상태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전화를 하는 관계는 아니었던 X선배로부터 "혹시 Y 소식 들었니?"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그다음에 나올 말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다음 말을 바로 연상할 수 있었던 스스로가 미웠다.


급작스러운 소식이었고 장례는 많은 일본인들이 그렇게 하듯 가족장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Y의 누나를 통해 간단히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었다. 장례 이후 9월에는 친구 및 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와카레카이'(송별회)가 있었다. 액자 속에 들어가 있는 Y의 사진을 보면서 실감했다. 더 이상 이곳에 없구나. 영화 얘기, 소설 얘기를 더 이상 같이 나눌 수 없겠구나. 그날 이후 나는 Y의 존재를 잠시 잊고 지냈다. 마음속에 어떤 뚜껑을 덮어놓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서른이 넘어도 내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깐 덮어놓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Y의 생일이 가까워지면서 송별회 때 집으로 한번 놀러 오라던 Y의 부모님 말씀이 생각났다. 핸드폰 사진을 정리하면서 Y의 사진을 발견한 것도 한몫했다. 지난 주말, Y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집으로 찾아뵀다. 일 년이 지나서야 찾아뵙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Y가 좋아했던 피스타치오 과자를 사갔더니 고마워하셨다. Y의 사진 앞에 향을 피우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했다. 간단히 대학원에서의 Y와의 관계를 설명을 드리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방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도쿄의 장례방식과 달라 힘들었던 것, 그렇지만 마지막을 아들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었어서 좋았다는 것, 그래도 자식이 부모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푸념, 장례식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어머님의 목소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녁시간이 가까워졌고,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고 제안해 주셨다. 장소는 Y가 가족과 자주 갔었다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한식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국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로서는 가족들끼리 외식을 해도 한식이 대부분이었고, 외국 음식이라고 해봤자 초밥이나 중국집이 많았다. 피자는 가끔 배달시켜 먹기도 했지만, Y의 가족에게는 자주 가는 이탈리안 음식점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했다. Y 아버님이 추천해 주신 구운 사과가 들어간 하이볼을 한잔 마셨다. Y가 좋아했던 술이라고 하신다.


식사를 마치고 Y의 가족과 사진을 찍었다. 길어봤자 두 시간이겠지 생각했던 방문이 다섯 시간이 조금 넘었다. Y의 부모님은 많은 얘기를 하셨다. 겉으로 울지는 않으셨지만 감정이 전해졌다. 내가 Y와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어낼 때마다, 당신들이 보지 못했던 아들의 모습이라며 놀라워하고 재미있어하셨다. 집에서는 말수가 적고 엄마에게 밥 달라고 하는 전형적인 아들이었던 걸까.


집에 돌아오는 길, Y를 통해 Y의 가족과 이어진 기분이 들었다. Y의 부모님과는 송별회 때 처음 얼굴을 뵈었으니 사실 이번 만남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반겨주시고 아들 같이 대해주셨다. 마치 Y와 어릴 적부터 친구여서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Y와 닮아있는 부모님의 모습에 내가 유독 일방적인 친밀감을 느꼈던 것일까? 어쩌면 이것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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