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준비하던 중 백수가 되어 버린 이야기
새로 이직한 회사는 분위기가 좋았다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내가 맡은 일을 데드라인 내 완료하면 됐다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업무 흐름을 타고 진행되었고
문제가 발생하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은
담당자들과 미리 조율하며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제대로 일하는 환경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가끔은 동료들과 퇴근 후 풋살을 하거나
밥을 먹으며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일이 엄청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저 매일이 큰 문제없이
흘러간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 뒤에는 불행이 온다는 말처럼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어떤 사람은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며 살겠지만
내 인생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열차였다.
잠시 웃을 일이 생기면
그다음엔 어김없이 하강이 찾아왔다.
나는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환승해야 할 점에 다가가고 있었다.
환승을 알리던 범인은 바로
강한 독감 정도로 여겼던 코로나였다.
코로나는 급격히 일상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마스크 없이는 외출도 어려웠고
혼밥이 일상이 되었으며
대면 대신 메신저가 주 의사소통 수단이 되었다.
손 소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커리어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걱정보다
조금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여자친구와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왔고
여러 사정으로 미뤄졌던 준비는
예식장 예약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그 시점에서 나는 프러포즈를 결심했다.
나는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이벤트에는 자신이 있었다
매년 여자친구의 생일마다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했고
그녀는 늘 만족해했다.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출퇴근길에는 틈틈이
수많은 프러포즈 후기를 읽었다
대부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카드나 편지를 곁들인 방식
실패하지 않을 정석
그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 욕심을 부렸다.
단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
거창한 계획이 시작됐다.
사람 상체만큼 큰 꽃다발
프라이빗한 펜션
수많은 풍선과 전자 촛불
그리고 프러포즈 선물까지
결전의 날
친구 커플이 먼저 펜션에 도착해 꾸미는 동안
나는 커플 데이트를 가장해 펜션으로 향했다.
도착 30분 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야 어디쯤이야? 아직 풍선이랑 초 다 못했어.
네가 너무 많이 사놔서 오래 걸려. 시간 좀 더 벌어줘."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대응했다.
"왜, 뭐가 필요한데?"
라는 말에 친구는 눈치껏
"커피 사다 달라 그래. 카페로 잠깐 들렀다 와."
하고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귀찮다며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아 갑자기 커피가 먹고 싶다고 해서 잠깐 들렀다 갈게."
살짝 의심하는 눈빛이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지나갔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서 다시 펜션으로 향했다.
예약한 펜션에는 별채가 두 개 존재했는데
하나는 프러포즈용으로 꾸며놓은 용도
나머지 하나는 친구 커플이 사용할 용도 겸
프러포즈 전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두 채를 예약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정말 프러포즈에 진심이었다
싶을 정도의 과소비를 했다.
이후 펜션에 도착해 별채 하나에서 시간을 보내다
해가 저물 무렵
나는 양복을 챙겨 차 안에서 갈아입고
트렁크에서 선물을 꺼내
프러포즈 별채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친구 커플이 자연스럽게 옆채를 구경하자며
여자친구를 유도했고
2층 계단을 오를 때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나는 편지를 꺼내 읽으며 프러포즈를 했다.
눈물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의식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가끔 그날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둘만 있었으면 눈물 났을 텐데."
그녀는 100% 만족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100% 만족했다
나에겐 100% 마음에 드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고생한 친구커플에게 욕을 먹고
미안함에 사과도 전달하면서
계획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돈은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버렸다.
그렇게 커다란 숙제를 마치고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월요일 출근했다.
그날 내 인생이
또 한 번 급격히 꺾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점심시간이 왔고 부장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평소처럼 따라간 나는
그 자리에서 '권고사직'이라는 단어를 듣게 됐다.
코로나 여파로 주 매출 부서가
강제 휴직에 들어갔고
우리 회사도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입사 순으로 권고 대상이 지정되었고
그렇게 나는 프러포즈를 한 다음날 백수가 되었다.
주요 부서의 어려움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칠 것은 생각하지 못했고
예상치 못한 현실이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안정적인 회사라 결혼을 준비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낙관해서 더 충격이었다.
그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었던 나는
세상이 변하는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무 능력의 부족함보다는
변화에 둔감했던 내 사고방식이 더 큰 문제였다.
그날 이후,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한다. 뒤쳐지기 싫다면 내 울타리 바깥을 자주 살펴야 한다는 것.
둘째, 프러포즈는 나의 만족을 위해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
혹시 이 글을 읽는 미혼 남성이라면, 나도 조심스레 조언을 남기고 싶다.
프러포즈는 예비 신부가 기대하는 만큼만 해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분명 만점짜리 예비 신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