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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에 어디까지 가능하세요?

이상한 얘기가 아니라, 조금만 더 얘기하고 가라고

by DayRewind

결전의 날인 만나기로 한 토요일 아침

상큼하게 커피를 마시고 외출 준비를 마쳤을 즈음

오후 2시쯤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만나는 시간 5시에서 한시간만 미룰 수 없을까요?"


이 메시지를 보자 전날 나눈 농담이 떠올랐다.

마음에 안 들면

피자 한 조각만 먹고 헤어지자는 얘기.

혹시, 피자 한 조각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닐까?

철렁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나는 평온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6시에 봐요."


옷은 며칠 전부터 고민해 두었던 코디를 접고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같은 스타일인

빨간 카디건과 베이지 치노팬츠

은근히 키가 커 보이는 로퍼를 골랐다.

장소는 합정역과 상수를 잇는 조용한 거리.

첫 만남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동네였다.


나는 두 곳의 식당을 미리 골라두었다.

1번 식당은 작지만 분위기 있는 양식집

단 웨이팅이 변수였다.

2번 식당은 비교적 넓고 쾌적하지만

웨이팅은 걱정없는 평범한 분위기.

네이버 지도로 동선을 미리 확인하며

1번이 실패할 경우 빠르게 2번으로

이동할 경로까지 시뮬레이션했다.


"좋아 준비는 완벽해 이 정도면 능숙하게 보이겠어"


6시 15분 전

합정에 미리 도착해

지하철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스캔하듯 살피던 중

그녀가 도착했다.

사진과는 조금 달랐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밝은 인사와 털털한 태도는

오히려 호감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 정도면 합격"


그녀는 모르는 나만의 합격신호를 보내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1번 식당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웨이팅이 있었고,

나는 자신 있게 2번 식당으로 방향을 틀었다.

2번 식당은 다행히 한 팀만 대기하는 상황이라

매장 앞 나무 테이블에 앉아 15분 정도 기다리며

서로의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무 능숙하게 합정을 휘젓는 모습에

여러 의구심이 들었는지

그녀가 질문을 날렸다.


"합정에서 소개팅 여러번 한 거 아니에요?"


아뿔싸, 나의 치열한 준비가

그렇게 생각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 질문 앞에 어리숙해 보이기 싫어서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 웃으며 아니라고만 대답했다.

짧은 침묵 뒤 들어오라는 매장의 신호가 있었고

우리는 매장에 들어가 파스타와 피자를 주문한뒤

자연스럽게 전날의 농담을 꺼냈다.


"혹시 피자 한 조각만 먹고 가시는 건 아니죠?"


그녀는 웃으며

아직 일어날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고

편안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다만 그녀가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당시엔 그저

본인의 컨셉을 잡는 것이라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내숭 말이다.

알고 보니 내숭이 아니라 비하인드가 있었다.


비하인드는 마지막에 공개하는걸로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미리 찜해두었던 칵테일바로 향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지만

내부 온도는 10월 치고 무척 더웠다.

더위에 약한 나는 금세 땀을 흘렸고

혹시 더러워 보일까 민망함이 올라왔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여기 너무 더워요. 칵테일도 별로고... 그냥 술이나 한잔 하러 가요."


속으로 90도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재빠르게 계산하고 나왔다

3차는 계획에 없었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던 동선 덕분에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나의 분위기는 완전히 안정됐고

그 순간부터 말문이 트였다.


결혼을 염두에 둔 소개팅이었기에

나는 솔직해졌다.

재무 상황, 사업 실패, 자존감 문제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다정하게 받아주며 리액션도 추가해주었고

나는 더 마음을 놓고 나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새벽 2시까지 나는 그녀의 귀에

피가 나게 할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냈다.


목소리가 슬슬 안 나올 즈음 술도 깰 겸

우리는 술집을 나와 카페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대부분 문을 닫은 시간이라

갈만한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민하다

나는 근처 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조용히 따라오다

어두운 골목에 들어서자 갑자기 물었다.


"지금... 이상한 데 데려가는 거 아니죠?"


나는 당황했지만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단지 갈 곳이 없을 뿐이에요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녀를 안심시킨 뒤

우리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공원에 앉아서

두 시간 넘게 더 대화를 나눴다.

이젠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얘기하고 싶어서

졸면서도 꾸벅꾸벅 대답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벌레가 있는 환경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나랑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그 공원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 후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택시를 부른 뒤

나는 징글징글하게 4차를 제안했다.


"근처에 24시간 우동집 있어요. 해장하고 들어가요."


그녀는 웃으며 단칼에 잘랐다.


"오빠, 그냥 집에 가요. 새벽 4시예요."


제발 좀 들어가라 잠좀자자는 표정이

얼굴에 쓰여있어 더 이상 권고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을 붙잡고 같은 택시에 올라탄 뒤

나는 중간에 내리기 전에

사거리의 우동집을 가리키며


"저기 가려고 했는데 진짜 맛있는데"


내릴때까지 미련을 접지 못한 집착남이었다.

그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친구들의 후기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찬

메신저에 대한 대답은 다음 날로 미뤄두고.

강렬했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의 목은 더는 목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가버린 상태로



비하인드

알고보니 그녀는 그날 소개팅을 취소하려고 했었다.

이유는 새벽에 오피스텔에서

소방 알람이 울려 밖으로 대피했고

다시 겨우 잠이 들었더니

아침엔 라미 시술한 치아가 떨어지고

네일아트까지 찢어졌다고 한다.


세상이 나와의 만남을 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약속시간을 한 시간을 미뤄 외모 점검을 마친 뒤

나와의 만남을 감행했다.

다만, 치아 문제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나는 그 모습을

내숭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날 그녀가 약속을 취소했다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억까를 무릎쓰고

나와의 소개팅에 나와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만남이 아닌 우동을 거절당한 게 오히려 내게는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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