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죽음이 두렵다, 무척.

by 유스
나는 죽음이 두렵다. 무척이나.


그래서 죽음에 관련된 책을 즐겨 읽는다. 죽음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언젠가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를 순위 매겼는데, 1위가 자식 사망이라고. 2위가 배우자 사망, 3위가 부모 사망. 모두 본인과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이었다.(재미(?)있는 건 스트레스 강도 12위가 결혼이었다.)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상상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족, 특히 엄마와의 이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먹다가 '언젠가는 이 맛을 못 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 찌개 맛을 좀 더 음미하는 식이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 그것은 사춘기 소녀가 가질 수 있는 사랑의 다른 방식이었다.

죽음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간단하다. 평범한 진리이지만 많이들 잊고 사는. 삶과 죽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말이다. 특히 죽음에 대해 논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말한다. 하지만 나 역시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우스갯소리로 갈 땐 순서가 없다고들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이 또한 사실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첫 직장에 다니던 꼬맹이 시절, 부검 현장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난 선배들과 한 국립대학교 의대 법의학과 부검실에 있었다. 부검실에 들어서자 시체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시체를 마주할 때 시각적인 충격보다 후각적인 충격이 강하다고 하던데, 죽음을 머금은 인간의 냄새란 실로 고약했다. 다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견딜만했다. 죽음의 냄새라고 하기엔 한낱 악취에 불과했으니까.

부검 의뢰 대상자는 40대 남성이었다. 고인은 갯벌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특별한 외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부검 결과는 익사였다.


난 부검대 위에 발가벗은 채로 누워있는 시신을 무뚝뚝하게 바라봤다. 숨을 쉬지 않는 게 분명했다. 부검팀이 그의 피부를 천천히 벗겨냈기 때문이다. 마치 옥수수 껍질을 벗겨내는 듯.

무기력함이 나를 감쌌다. 죽음이라는 것이 별 게 없구나. 괜히 얼큰한 육개장이 먹고 싶어 졌다.


당시 나는 어릴 적 돌아가셔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외할머니의 죽음 외에는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타인의 죽음은 나에게 철저히 ‘일’의 분야였다. 물론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하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그것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생의 너머로 간 다른 인간에게 행하는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부검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한 참관인이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자 부검팀은 “손을 빼고 예를 다해달라”라고 이야기했다. 고인에게 마지막 예를 갖추는 것이 부검의 기본인 것이다.

잠이 안 오는 밤 상상력은 극대화되곤 한다. 굉장히 괴로운 밤. 여름이 되면서 단골로 찾아오는 상상력은 내가 사는 아파트 2층 베란다 난간을 넘어 누군가 우리 집을 침입하는 상상이다. 자고 있던 남편은 침입자를 막고 나는 주변에서 남편을 도와 무언가를 휘두르며 그에게 대응할지 상상한다. 얼마 전 겨울옷을 넣고 공기를 뺀 압축팩이 꽤나 딱딱하던데 그것으론 어림도 없으려나? 침대 머리맡에 장식용으로 걸어둔 나뭇가지는 형편없이 부러지겠지?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이 상상이 끔찍한 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족이 내 곁을 떠날까 두렵다. 그들이 아프진 않을지, 다치진 않을지, 그래서 내 곁을 떠나진 않을지.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엔 자기중심적인 두려움이다. 그들이 날 떠난다면 내가 힘들어질 것이고, 난 그것이 두렵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도 회사 동료의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친한 동생의 아버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다양한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혹은 나는, 어떻게든 죽음에 익숙해질 순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 브런치에서 한 작가님의 글을 읽었다.

의사가 사망을 선고할 때, 엄마와 아빠와의 시간들이 필름처럼 내 눈 앞을 지나갔다. 나는 펑펑 울었는데, 그건 후회나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모든 장면이 다 좋은 장면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사람들은 나를 도대체 얼마나, 어떤 사랑으로 사랑했기에. 아직 따뜻함이 남아있는 손을 붙잡고 나는 엉엉 울며 말했다. “어떡해, 좋았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
- 안녕워녕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의 슬픔’


이 글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선 충격적이었다. 나와 가까운 이들을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글로만 죽음을 접해왔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산 자에게 좋았던 기억만을 남기게 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내가 고민하고 염두해야 하는, 죽음에 대한 가장 큰 마음가짐이 아닐까, 하는.


생을 마감한 육신에겐 산자의 냄새도, 호흡도, 온기도 없다. 나는 내가 가진, 내가 살아있기에 가지고 있는 따뜻하고 활기차고 보드라운 기운을 새삼 떠올린다. 누군가를 쓰다듬고,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이 모든, 생의 증거. 사랑하는 이들에게 좀 더 다정해지고 싶은 밤이다. 자고 있는 남편의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싶은, 그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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