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어요

나 결혼할 수 있을까 <5>

by 유스

우리는 소개팅 다음날 연애를 시작했다.
나와 그는 오랜만의 연애였다. 그동안 비축해놓은 에너지가 상당했던 참이다.

삼십 대의 우리는 마치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매일 잠들기 전 핸드폰이 뜨거워서 통화를 할 수 없을 때까지 통화했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며 통화하는 것은 정말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린 그 모든 걸 피아노 건반을 처음 눌러보는 아이들처럼 신중하고 성실하게 때로는 호기심 넘치게 해내고 있었다. 누적되는 통화량과 쉴 틈 없이 달아오른 배터리는 나의 사랑의 에너지를 반증했다. 사랑의 배터리라는 노래의 가사는 모르지만 왠지 내용을 알 것 같았다.


소개팅 당일 우린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H는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마침 다음날 오전이 내가 사는 아파트 뒤 체련공원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그는 내게 경기를 보러 오라고 했다. 그냥 우스갯소리거니 생각하며 나는 그러자고 했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대답을 하는 것은 나의 고질병이다. 가벼운 질문과 의미 없는 답이 관계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해 새해벽두 난 '올해의 하지 말아야 할 일'로 얼평(얼굴평가)과 지키지 못할 말을 내뱉는 것을 목록으로 세워은 터였다. 하지만 난또 습관처럼 그러고 말았다.


다음날 침대에 파묻혀있던 나에게 경기장에 언제 오냐는 톡이 왔다. 난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며 일어났다. 진짜 오라고 할 줄 몰랐네.. 라고 중얼다.


우리는 매일 만났다. 예외가 있는 날은 없었다. 매일의 연속 중에 내가 H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그는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축구를 청나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육중한 몸과는 달리 경기장에서는 날렵한 편인데 나중에 그의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론 그가 공을 향해 뛰어올 때면 마치 야생 멧돼지 한 마리가 먹이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아 얼른 공을 주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생활축구 10년 차, 그는 주말 아침과 평일 저녁, 매주 2차례 이상은 축구를 한다. 단순히 공을 차고 달리는 것뿐만이 아닌 축구를 배우고 싶고 잘 알고 싶다는 열정으로 대한축구협회 심판 자격증까지 땄다는 것도 알게 됐다.
H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저만큼의 열정을 다해 좋아했던 적이 있던가?
없다.

아니? 성급한 결론을 내릴 뻔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H를 향한 마음은 완충된 사랑의 배터리였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삶을 살고 싶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려주고 싶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공유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가 현재의 연장선상이 되는, 시공간을 무시할 만큼의 용기가 생기는 그런 사람이 H였다.

운동을 좋아하는 H와 달리 난 운동이라면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치를 떤다. 가끔 웹툰 샌프란시스코의 화랑을 보며 동네 태권도장을 검색하고 도복을 입은 내 모습을 생각만 하는 머무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축구를 좋아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축구는 전반 45분, 후반 45분, 연장 전반 15분, 연장 후반 15분으로 최장 120분. 만약 H가 좋아하는데 야구였다면? 2019 시즌 야구의 평균 경기 시간이 3시간 11분이라고 하니 최장 120분의 축구보다 71분이 긴 셈이다. 120분과 191분, 71분의 차이만큼 난 H가 더 좋아졌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은 성숙한 연애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부분이었다.
나는 축구에 대해 흥미를 가지려 노력했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쉽지는 않았다. 없던 흥미를 있게 만드는 것은 강냉이를 뻥튀기로 만들 때 들어가는 뻥튀기 아저씨의 근력과 기계 안의 열기와 휘청댈 정도의 소음을 뛰어넘을 정도의 일이었다.

H는 내 취향의 영화를 함께 보러 다녔다. 마블이 영화 세계의 전부였던 그에게 나는 홍상수와 코엔 형제와 다르덴 형제와 타란티노와 소렌티노의 영화를 보여줬다. 다 큰 성인 남자의 손을 끌고 데려간 곳은 무서운 치과보다 지루한 독립영화관이었다. 내가 축구장에서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것처럼 H는 영화관에서 낮은 코골이를 하며 잠이 들었다. 취향은 변형되진 않았지만 같은 시공간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돼있었다.

그는 내 첫사랑도 내 첫 잠자리 상대도 아니었지만 처음인 것은 많았다. 처음으로 연락을 기다리게 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부끄러움 없이 생리 현상을 방출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내 엄마와 함께 술을 마신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나와 노래방을 간 사람이었다. 그렇게 치니 내 연애 역사 중 가장 처음이 많은 사람이 바로 H였다.

그중 가장 좋았던 처음은 이거다. 처음으로 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H와 함께 있을 때 입을 가리지 않고 깔깔 웃는 내 모습이 좋았고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수다를 떠는 내 모습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떵떵대는 내 모습도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만난 지 3개월째 되는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