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합, 그리고 결혼 날짜

나 결혼할 수 있을까 <6>

by 유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친구들을 따라 종종 사주를 봤다. 특히 친구 정이 사주보기를 취미처럼 했었는데 그와 갔던 역삼동의 한 철학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역술가는 미리 전달받은 우리의 생년월일을 풀어놓은 사주를 빔프로젝트를 통해 30분 정도 브리핑했다.

나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양반 팔자라며 앞으로 근사한 곳에서 일을 하겠다고 했고, 친구한테는 곧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몇 개월 안에 회사에서 잘린다고 말했다.

실은 이곳은 나의 회사 동료가 호들갑을 떨며 추천해줬던 곳이었다. 역술가는 그 동료에게도 곧 회사에서 잘린다고 말했는데 실제 그녀는 회사에서 거의 해고 수준의 처분을 받았던 참이었다. 그 이야기를 미리 듣고 간 친구 정은 사주가의 풀이를 들으며 기분이 정말 더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철학관은 친구 정과 더불어 사주에 남다른 취미가 있는 친구 임이 소개한 곳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날은 엄마와 H가 함께였다는 것이었다.


사귀기 초반부터 궁합은 절대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남의 말에 영향을 잘 받는 성격인지라 혹시라도 좋지 않은 풀이를 듣게 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무슨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궁합을 떠올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다. 양가 어른들은 결혼 날짜를 잡기 위해 '길일'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궁합을 보는 것이 필수 코스라고 했다. 맙소사. 이거 꼭 해야 하나.

결혼식을 올리기 가장 좋은 길일을 받기 위한 날, 엄마와 나와 H는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며 철학관이 있는 빌딩 엘리베이터에 몸을 담았다.


철학관 예약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주 나의 엄마 조가 혼자 가기 위해 예약을 했다가 갑작스레 취소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단은 나의 소심한 마음과 방정맞은 입이었다.


다음은 카톡 내용.

엄마 궁합 안 좋게 나오면 어떡하지? 그럼 찝찝할 텐데.

엄마 내가 예전에 사주를 봤는데 같은 띠 남자를 만나면 재수가 없대.(H는 동갑)

엄마 그냥 사주쟁이가 궁합 이야기하면 귀 틀어막고 듣지 말고 날짜만 받아와. 알았지?


결국 조가 폭발했다.


이것도 카톡 내용.

사주 보면 안 좋은 거 나온다고 하니? 그럼 날 받지 말고 결혼 식해.

날(짜) 둘이 잡아 난 안 볼 테니까.

내가 궁합 안 좋게 나오면 너네 둘 결혼 못 하게 할까 봐 그래? 니 결혼이니까 알아서 해.


엄마 조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니 깨닫고 반성하기보다 어서 화를 풀어주고 다시 철학관 예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석고대죄를 하겠다며 평소 답지 않게 능청을 떨며 싹싹 빌었다. 이쯤 되니 내가 결혼에 환장을 했나 싶었다.

조는 못 이기는 척 철학관 예약을 다시 했고, 그리고 그 날이 오늘이다.

먼저 나와 H의 각각의 사주 풀이가 시작됐다. 엄마 조의 앞에서 듣는 우리의 사주는 어색했고 불편했다. 역술가는 현재 H가 직장에서 마음이 떠있다는 이야기와 돈이 들어올 사주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들은 왠지 엄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을 들게 했다. H의 표정이 굳은지는 오래였다.


역술가는 말했다.

사주적으로 둘이 잘 맞고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요.


궁합 역시 잘 맞는 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철학관에서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너네 둘이 안 맞으니 결혼 말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의무도 없고 이런 곳에서는 으레 좋지 않아도 좋게 두리뭉실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을 테니 저런 사주가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본다. 합리화란 이런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나쁘지 않은 사이다. 이 정도 궁합이면 나쁘지 않다. 같은 띠면 재수 없다는 말보다 백배 낫다.


우리의 주문은 11월부터 12월 초 정도의 날짜였다. 전문가답게 달력을 쓱 보더니 날짜가 단번에 나왔다. 11월 4일, 11월 25일. 4일은 우리 둘에게 좋은 날짜인데 25일은 남자에게만 좋은 날짜란다.


다음은 역술가의 부연설명.

어차피 남자가 기준이 돼요. 여자를 먹여 살릴 거잖아요? 여자한테는 운이 부족한 날이지만 남자한테는 아주 좋은 날짜예요.


사주라는 것은 같은 해와 달, 날, 시를 넣어 보는 것인데 왜 역술가마다 다른 해석이 나오는 걸까. 살면서 여러 번의 사주를 봐왔지만 그때마다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는 나는 내가 벌어먹을 팔자라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길거리에서 만난 역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니가 낼모레 죽잖아? 그럼 넌 내일까지 일할 팔자야.


역술가 아저씨는 정말 반말로 저렇게 말했다. 문득 조만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회사에서 잘린다는 사주풀이를 듣고 있던 친구 정의 표정이 생각났다. 내 표정도 그녀처럼 썩어있었을 것이다.


결혼날짜가 정해졌다. 진짜 길일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11월 4일.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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