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과 점심을 마시고 카페에 들렸을 때 며칠 전부터 준비해온 말을 던졌다. 말을 뱉고 나니 홀가분하기보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으악, 헉, 대박. 각종 추임새가 난무하는 현장에서 눈이 휘둥 그래진 50대 부장님이 한마디 하셨다.
“쇼킹하네.”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비혼주의자’, ‘독신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바, 내 결혼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충격스러워 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말을 잇지 못했고, 그들은 결혼 이후 “그때 너의 발언은 충격이었다”라고 고백했다.
난 뜨거운 이슈의 중심에 서서 결혼식에 올 사람들을 떠올렸다. 부장님 오실 거고, 우리 팀원인 미지, 수정, 지은도 올 테고, 전 직장 사람들 중에는 영민 선배랑 태훈 선배랑… 친구 중에는 경식이랑 광가랑….
앞서 결혼했던 친구들이 결혼식 사진을 찍는 순간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던데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남들에게 나의 인간관계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보이는 순간이 결혼식 말고 또 있을까? 장례식장 빼고.
생각해보니 첫 직장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직장인의 마음으로 주말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결혼식 하객알바를 하게 된 적 있었다. 돈도 벌고 기사 아이템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때 난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르는 한 남성의 직장동료 역할을 맡았는데 우리 팀에게 주어진 역할은 하객사진 찍기였다. 지인 포토타임에 신랑 측 옆에 서있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다.
하객대행 사이트 담당자는 예식이 몰리는 봄과 가을에는 일주일 평균 4~5건의 대행 업무가 있다고 했다. 수도권은 대행 업무가 보다 전문적으로 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었다.
나를 포함해 ‘일일동료’가 된 아르바이트생 5명은 약속 장소에서 만나 함께 봉고차를 타고 덕진동에 있는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봉고차에 앉은 우리 다섯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식장에 도착해서는 함께 식장에 들어갔다. 신랑 입장부터 사진 촬영 시간까지 우린 성실하게 자리를 지켰다.
나의 일일동료이자 고용주인 낯선 신랑이 입장할 땐 난 진심을 다해 손뼉을 세게 부딪치며 축하했다. 식이 진행될수록 점점 저 낯선 부부가 정말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신랑에게 다가가 축하한다는 말까지 건네고 싶은 심정이었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이날 일정의 일당은 1만5,000원. 당시 시급으로 치면 다른 아르바이트의 3배 이상 되는 액수였다. 현장에서 현금으로 받은 1만5,000원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나는 그들의 결혼사진에 영원히 각인됐다. 그래서인지 가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그 신랑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들이 결혼사진 속 나를 포함한 5인을 보며 생경해하고 재미있어할지 아니면 결혼사진을 쳐다보지도 않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하객 알바를 부를 돈이 없었으므로 종이에 지인들의 이름을 썼다 지웠다 수차례 반복했다. 정말 결혼식에 올 거라는 확신을 가질만한 사람들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결혼식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면 안 되었기에 ‘올까 말까’ ‘부를까 말까’ 한 사람들은 모조리 제외시켰다. 하다보니 인생의 쭉정이를 걸러내는 작업이 이 청첩장 작업인 것 같았다.
1차 선별 작업이 끝나자 과거에 내가 축의금을 내고 그 순간부터 연락이 끊긴 쭉정이들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많았다. 전화기를 붙잡았다.
“종민아 오랜만에 연락하네. 잘 지내냐?”
대학생 때 알바를 하며 친해진 남자사람친구 종민은 3년 전 대구에서 결혼했다. 나는 전날 서울에서 2시간 40분간 버스를 타고 전북 전주로 내려와, 다음날 다시 대절버스를 타고 3시간 30분 걸려 대구로 떠났다. 진짜 똥꼬가 빠질 정도로 피곤한 일정이었다.
“야, 내가 대구까지 갈 정도로 종민이랑 친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온 김에 그냥 가.” (더 안 친한 다른 친구)
출발을 앞둔 버스 앞에서 이 결혼식을 가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하는 사이가 나와 종민의 관계였지만 어쨌든 나는 검은색 정장 원피스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대절 버스에 몸 담았다. 친하지 않은 남자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삐죽한 옥수수 마냥 어색하게 있던 나는 전주로 돌아오는 대절버스 앞에서 떠나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종민에서 다짐하듯 말했다.
“넌 내가 미국에서 결혼한다고 해도 와라. 꼭.”
이후 종민과 나는 깔끔하게 연락이 끊겼다. 청첩장 리스트를 정리하며 난 똥꼬가 빠질 정도로 피곤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 수고스러움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런 작고 유치하지만 억울한 마음들은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것 같다. 전화기를 들었다.
“오랜만이지~ 어쩌고 저쩌고. 그나저나 나 결혼한다.”
비록 몇 년 만에 마음에도 없는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건 나 자신이 추접스럽게 느껴졌지만, 통화 내내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참아야 했다. 나의 축하를 거쳐 간 결혼 선배들도 다 겪었을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거르고 걸러 40여 명의 지인 리스트가 완성됐다. 이들의 경조사엔 나 역시 무조건 간다는 마음으로 청첩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결혼식 과정에서 가장 불편하고 쑥스러운 시간이었다.
예전에 시골길을 가던 중 한 할머니가 키질을 하는 걸 본 적 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곡식에서 쭉정이와 돌멩이를 거르고 있었다. 몇 번의 키질로 할머니의 소쿠리에 실한 알곡들만 남았는데 키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거무튀튀한 것들 중 어떤 것이 쭉정이인지 알곡인지 한 눈에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이 쭉정이냐고 물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