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운명

나 결혼할 수 있을까 <4>

by 유스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진 빌 게이츠나 완벽한 대칭의 외모를 자랑하는 배우 김태희를 부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타고난 성정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포기가 빨라서 인 것 같다. 대신 나보다 월급을 매달 20만 원 더 받고 있는 동료나 뱃살이 없어 티셔츠를 청바지에 넣어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가끔 부럽다. 만약, 내가, 조금만, 이라는 가정법을 세워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부류에 대해선 문득 부러운 것이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꾸준히 부러워하는 부류가 하나 있다. 술을 마시고 숙취가 없는 사람이 그렇다. 난 취하고 싶지만 숙취가 두려워 차마 함부로 취할 수 없는, 취할라치면 솜털부터 곤두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술찌(술 찌질이)다.


H는 술이 센 편이었다.

숙취 있어요?

술찌가 묻자 H가 대답했다.

없어요.


맥주는 무한대요, 소주도 뭐 마시고 싶을 때까진 마신다는 그는 내가 꿈꿔오던 사람이었다. 술을 즐기는 데다 잘 마신다니.


난 그와 동네의 분위기 있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술 마실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신은 나에게 술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간을 주셨지만 술을 대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열정적 이도록 허락하신 것 같았다.


우리는 밥집에서보다 좀 더 편안해졌다. 알코올을 앞에 둔 이들만이 누리는 특권. 어두운 조명, 활력 넘치는 분위기, 게다가 취하면 웃음이 많아지는 나. 술을 먹자고 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술을 좋아한다. 적당히 분위기를 즐기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취하고 싶어서 마신다. 문제는 숙취다.


숙취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교훈을 심어줬던 기억이 떠오른다. 겨울이었다. 첫 직장에서 육군 부대 사람들과 회식을 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가방에서, 검은 비닐에서 어떤 액체들을 꺼냈다. 매실청, 보드카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은 술과 함께 섞으면 좋을만한 어떤 것들이었다. 군인들은 이 모든 걸 냄비 같은 것에 한데 섞었고 우리는 함께 으쌰 으쌰 하며 정체모를 액체를 들이켰다.


나는 다음날 예정이었던 회사 워크숍을 대신하고 차가운 새벽, 엄마와 오빠의 부축을 받고 응급실로 향했다. 위에 있는 모든 음식물을 개어냈지만 구토는 계속해서 나왔고 구토 10회 차가 되자 녹색의 쓸개즙이 나왔다. 내 몸에 쓸개가 있다는 걸 새삼 알게된 날이기도 하다. 난 구토로 인한 탈수 증세를 호소하며 불편한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잠깐 눈을 부친 후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10통 이상 와있었다. 다른 부서 선배였다. 막내 주제에 워크숍에 빠지냐며 초 흥분 상태. 그녀는 전화기 너머 다 죽어가는 내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술 조절도 못해서 무슨 사회생활을 하냐? 회사 생활이 우스워? 빠져가지고는. 당장 튀어나와.

꾸짖는 선배의 전화에 기어가는 목소리를 짜내 겨우 한 마디를 던졌다. 군인들하고 마셔보셨나요..


그날 이후 나는 숙취에 대한 거대한 공포가 생겼다.


H와의 술자리는 즐거웠다. 그는 밥집에서와 달리 많이 웃었는데, 웃는 모습이 요리사 백종원을 닮은 것 같았다. 누군가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거짓말 같게도 그 순간의 나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백종원을 닮은 사람이라니. 그게 더 거짓말 같았다.

(백종원님은 멋있습니다. 단지 제 이상형이 아닐뿐입니다.)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게됐다. 내 나이와 그에 따른 사회적인 시선이 나를 결혼 적령기 여성으로 만들었고, 흔치 않은 소개팅의 기회 중에 흔치 않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으니 높은 확률로 그와 결혼을 할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운명보다 강력한 현실이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나는 H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그는 택시를 타고 내 집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난 2차를 가자고 졸랐다. 좀만 더 마시자고. 내가 산다고. 진상으로 볼 거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진상이 맞았으니까.


우린 편의점에 가서 세계맥주 4캔을 사들고 집 근처 공원으로 갔다. 세상이 비틀거렸다. 오래간만에 취기를 경험하는 기분좋은 나는 누구보다 힘차고 발랄하게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힘 조절이 안됐던 탓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조잘조잘 이야기 하던 중 쉼표를 틈타 내 괄약근의 방심과 함께 그것이 나왔다. 평소라면 힘없이 ‘피시쉬’ 나왔을 그녀석이 이 날따라 기운찼고 파이팅이 넘쳤다. 그녀석이 외쳤다.

뽝!!!

느낌표 세개까지 포함해서.


자정이 가까워진 어둑한 공원엔 우리 둘 뿐. 세상은 침묵했다. 난 아닌 척 모르는 척 소리내서 더 활발하게 웃었다. 모르겠지. 못 들었겠지.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듯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H가 토끼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소개팅 장소로 생각해온 음식점이 문을 닫았을 때보다 좀 더 당황한 거 같았다. 아이씨 들었네...


그는 당황했고 난 웃음이 터져버렸다.

토끼눈의 H가 매우 귀여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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