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71세의 의상 디자이너

시골, 라이프

by 유스

민순 할머니가 드르륵 재봉틀을 돌린다. 익숙하고 능숙하게. 바짝 깎은 손톱에 크지 않은 손의 움직임이 야무지다. 올해 일흡하나인 그녀의 이름 석자 앞에는 아주 멋있는 수식어가 붙는다. 의상 디자이너.


“열여덟에 전주에 있는 양장 학원을 다녔어. 그러곤 스물둘에 서울에 갔지. 서울 명동서 바느질했어.”


국민순(71) 할머니의 하루는 순의상실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일터이자 집인 그녀만의 공간. 35년 여가 넘도록 비와 눈을 견뎌낸 ‘순의상실’이란 작은 간판은 할머니의 정체성이자 삶의 이름표가 됐다.


“내 이름이 민순이잖아. 국민순. 쉽게 하려고 내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따서 순의상실이라고 지었지.”


SAM_1759.jpg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 있는 순의상실.
SAM_1752.jpg 민순할머니의 하루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삶의 공간.


홀로 친척집에서 생활하며 명동에서 남의 의상실 일을 돕고 배웠다. 그리고 그녀 나이 스물여덟, 고향으로 내려와 처음 자신만의 가게를 차렸다.


“연애결혼했어. 그때 지금 아저씨는 여 고산에 계속 있었지. 지금 말로 장거리 연애한 거야. 이 길에 양장점만 8개 정도 있었어. 나도 그중 하나였지.”


요즘 사람들은 공장의 영민한 기계들이 턱 하니 만들어낸 세련된 기성복을 입는다. 표준화된 디자인과 사이즈에 취향과 몸이 길들여졌다. 민순 할머니가 만들던 옷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람마다의 체형과 취향으로 완성되는 옷. 민순 할머니는 한 벌의 옷에 존중이란 단어를 담았다.


“나는 여자 옷이라고 생긴 건 다 만들었어. 그 시절엔 옷을 다 맞춰 입었지. 시집 갈람 드레스도 맞춰 입어야 했던 시절이야. 제일로 많이 만들었던 건 아무래도 투피스였지. 옷 한 벌 가격이 쌀 한 가마니 가격 정도 됐을걸. 한 3~4만 원 했으려나.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특별하게 기억되는 자가용이 있다. 회색 빛깔 엘란트라. 차량번호는 3872번. 잊을 수 없는 네 자리 숫자. 그녀가 번 돈으로 장만한 차였다.


“고산중학교 교복을 정하는데 여러 디자인 중에 내 디자인이 된 거야. 그때 전교생이 750명이었으니까 내가 그 750명 옷을 만든 거지. 그거 해서 엘란트라를 뽑았잖아. 차번호도 안 잊어버려. 우리 애들도 그 교복 입고 학교 댕겼어.”


열여덟에 처음 잡은 실과 바늘은 칠십이 넘어서까지 그녀의 바지런한 두 손에서 여전히 움직인다.


“애들이 그때는 엄마가 이런 일 한다고 별로 안 좋아했었어. 근데 지금은 이렇게 좋은 직업이 없다고 해. 이렇게 나이 먹고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시대는 변한다. 옷의 시대도 변했다. 민순 할머니의 시대도 그 변화에 몸을 담았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나온 옷을 입고, 순의상실의 단골들도 서서히 기성복을 입기 시작했다.


“기성복 시대가 돌아오니 맞춤옷을 입는 사람이 별로 없어. 나도 나이를 먹고 힘들어서 요즘은 편하게 수선일을 많이 해. 한 십 년 됐나.”

SAM_1744.jpg 이제는 의상 디자인보다는 수선일을 주로 하신다.
SAM_1696.jpg 순의상실은 동네 사랑방이다.


순의상실에는 늘 사람들이 모인다. 비를 피해 들어오고 안부를 물으러 문을 열고 맛난 먹거리 하나 나누러 자리를 잡는다. 덕분에 요즘 순의상실에는 고구마 박스가 쌓여있다. 이웃들과 함께 나눠먹으려고 민순 할머니가 사다 놓은 것이다.


“시골은 이래. 다 나눠먹고 그런 거지 나만 그러간. 3년 전인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여기 문을 닫으려고도 했는데 건강이 또 괜찮아지대. 여기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어. 사람들이 오가니까.”


지난 스물두 살 어린 아가씨는 낯선 서울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때 외롭지 않았냐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잖아. 외롭고 그런 건 다 똑같아. 공평하지.”


아마도 쉬지 않고 움직였을 바지런한 손과, 그리고 실과 바늘이 있었기에 민순 할머니의 삶은 공평하지 않았을까.


SAM_1702.jpg 의상실에서 찾은 오랜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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