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래된 풍경_방앗간

시골, 라이프

by 유스

간판이 세월을 말한다. 장장하게 붙어있던 전화번호의 숫자도 하나둘 떨어져 이제는 네 자리의 숫자만 남았고, 방앗간이란 글자도 성하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현떡방앗간은 살아있다. 곡식 빻는 기계가 돌아가고,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40여 년이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조현영(84)-한현숙(81) 부부는 한결같이 이 자리를, 이 공간을 지키고 있다.


현떡방앗간이 처음부터 방앗간은 아니었다. 1973년께 부부가 전주에서 삼례로 온 후 처음 이 자리에서 문을 연 것은 전업사였다. 이후 사람을 두고 미장원을 운영하다 중화요리 전문점을 했고 잡화상을 거쳐 철물점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방앗간을 열었다.


“장사하는 사람은 남 안 속이고 할 수가 없어. 남 속이기 싫은 마음으로 장사를 하니께 뭘 해도 장사가 안 되는 거여. 그러다 내가 돌아다녀 보니까 방앗간은 남이 가져온 걸 그대로 가공만 해주는 거더라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이 없겠다 싶었어. 그래 갖고는 방앗간을 시작한거여. 상대방에 상처가 안 가고 남을 속이지 않는 거.”


시간을 알 수 있는 허름한 간판.


전북 완주군 삼례 구시장에 위치한 현떡방앗간. 과거에는 이 인근이 시장의 중심이었고, 익산 왕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사람이 많았고 장사가 잘됐다. 지금 방앗간이 있는 이 거리는 과거 술집이 많았다.


“여 앞에 대구집이 있었고 옆에는 신성여관이랑 통정하숙집이 있었어. 이 방앗간도 원래는 신풍옥이란 술집이었어. 우리 방앗간 기계 있는 곳 있잖어? 거기가 옛날 신풍옥의 홀이었지. 사람들 노는. 그걸 내가 새로 했어. 근디 이 집이 원체 고가(古家)라서 짜그라지더라고. 그래서 또다시 했어.”


오가는 사람이 많았고, 집에서 떡을 해 먹던 시절이니 방앗간도 당연지사 장사가 잘됐다. 특히 명절 때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잠도 못 자고 밥 먹을 시간도 없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영광스러운 시절. 불을 때서 솥단지를 걸어놓고 쌀을 쪘고, 만들어진 떡은 각자 집으로 가져가 직접 썰어먹었던 때다.


“옛날에 바쁠 적에는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렸지. 명절이면 우리 때부자 됐어. 한 백만 원 벌었던가. 지금은 한 달 내 해도 십만 원 못 벌어. 옛날처럼 집에서 떡을 해 먹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다 사먹잖아.”


요즘은 손님보다도, 동네 이웃들이 서로 어울리기 위해 현떡방앗간을 찾는다. 모여서 재미화투를 치기도 하고 수다를 떤다.


“우리가 방앗간 주인이 될 거라 어디 상상이나 했겄어(웃음). 이젠 힘들어서 못해. 여긴 돈은 못 벌어. 우린 고지식해서 거짓말도 못하거든. 몸도 약해서 장사 하도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야. 그래도 요새는 김장철이라 가끔 누가 와서 고추도 빵구대. 기냥 여기는 양로당이야. 매일 7~8명 썩은 놀러와. 사람들이 안 오면 우리가 심심해. 인자 습관이 된 거 같아. 이제 외따로 못 살어 우린.”


조현영(84)-한현숙(81) 부부
노부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방앗간의 기계들.


‘남을 상처 주지 않고 속이지 않기 위해’ 방앗간을 시작한 노부부. 그들의 고운 심성 덕분인지 그들 주변에는 늘 좋은 사람들만 있어왔다. 서로에게 좋은 가족이자, 좋은 이웃.


“방앗간 초반에 실수해서 남한테 값을 물어준 적은 있어도 돈 안 내고 도망간 사람은 하나도 없어. 싸움하는 법도 모르지만 그 사람들도 그랬어. 평생 싸워본 일이 없어 우린.”


어느새 밖이 어둑해졌다. 현떡방앗간에도 불이 밝혀진다. 그 빛이 참으로 따뜻하다. 이제는 사람 온기가 없는 곳에서 홀로 살 수는 없다는 노부부. 그것이 그들의 겨울이 따뜻한 이유다. 자신들을 잊지 않고 방앗간을 찾아오는 이웃들의 온기 덕에 겨울이 따뜻할 것이라고, 노부부는 그리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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