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아니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네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는지, 오래전 읽다 만 책 구절이었는지, 아니면 술자리 누구의 흐릿한 조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 문장은 때때로 냉장고 문에 붙은 메모지처럼 내 의식 표면에 떠올랐다가, 이내 미끄러지곤 했다. 좋은 친구를 얻고 싶다면, 나부터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지. 머리로는 아는데, 그게 꼭 편의점 삼각김밥 포장 뜯는 것처럼 간단치가 않다. 오히려 덜 익은 라면 면발처럼 뻣뻣하고, 덜컹거리는 마음만 남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어떤 풍경으로 기억될까. 사진첩 속 희미한 배경처럼, 그냥 거기 있는 존재일까. 아니면 가끔 꺼내보는, 먼지 쌓인 기념품 같은 걸까.
온 세상이 친구, 오직 친구로만 이루어져 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교복 주머니엔 늘 구겨진 천 원짜리 몇 장과 친구들의 비밀이 함께 들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였고, 서로의 메아리였다. 가로등 불빛조차 인색했던 동네 놀이터 구석, 삐걱, 하고 녹슨 그네에 나란히 앉아 눅눅해진 새우깡 한 봉지를 나눠 먹던 밤. 플라스틱 병에 담긴 밍밍한 소주를 홀짝이며 우리는 세상 전부를 가진 듯 웃었다. 가진 거라곤 당장의 시간과 서로밖에 없었지만, 그 시간은 우주보다 비쌌고 우리는 아낌없이 서로에게 그 우주를 선물했다. 미래 같은 건 까마득했고, 오직 현재의 서로만이 반짝였다. 그때 우리의 눈빛은 분명 같은 온도를 향해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그 시절 풍경은 빛바래고 군데군데 끊어졌다. 그때의 친구들은, 그때의 그 모습으로는 이제 여기 없다. 추억은 희미한 얼룩처럼 남아있지만, 다시는 사 먹지 않을 불량식품의 기억처럼 아련하면서도 입맛이 쓰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변질된 걸까. 이제 우리는 서로의 고민을 나누지 않는다.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불안이나 사무치는 외로움 같은 건 화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대신 누구네 아파트값이 마침내 얼마를 찍었는지, 이번에 누가 부장으로 승진했는지, 자식은 기어코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에 대한 소식들이 그 빈자리를 능숙하고 태연하게 채운다. 모두들 필사적으로, 지금의 자신이 과거의 그 애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그 목소리들은 어딘가 공허하게 부딪혔다가 흩어졌다.
가엾게도, 나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친구를 찾거나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 더 정직해지자면, 그들의 근황에 무감각해진 지 오래다. 그들이 손에 쥔 반짝이는 성취나 소소한 행복에도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면서도 내 목소리가 투명한 유리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다만, ‘고독한 성장’이라는 이름표를 스스로에게 붙여준 채, 인생의 두 번째 챕터로 넘어온 것뿐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껍질처럼 얇아진 관계 위로, 아직 여물지 않은 내 속살 같은 사연들을 구태여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상처를 보여주기엔 우린 너무 멀어졌고, 위로를 건네기엔 서로의 언어가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렇게, 조용히 멀어진다. 누구 하나 먼저 손 놓았다고 탓할 수도 없는, 서서히 식어가는 찻잔처럼. 이별은 때로 소리 없이, 예고 없이 찾아와 등 뒤에 서 있다. 돌아보면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감미롭다고 하기엔 조금 서글프고, 슬프다고 하기엔 어딘가 담담한, 그런 종류의 이별 속에서 나는 그저 조금 더 단단한 혼자가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