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전, 나는 다이어트차 권투 체육관을 다니고 있었다. 나같은 저질체력에게 복싱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운동이었다. 남들은 숨 쉬듯 쉽게 뛰는 줄넘기도 100개 채우기 힘들었고, 체력강화 훈련이라도 하는 날에는 거의 초주검이 되었다.
반년이 지나자 복싱은 월례 행사로 전락해 버렸다. 모처럼 운동을 나가려는데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이 기어코 따라나섰다.
"아빠, 아빠, 나도 따라갈래요"
나는 그냥 집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지만 계속 졸라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자. 대신 얌전히 앉아서 구경만 해야 해"
연간회원권이 무색할 만큼 간헐적 출석을 한 덕분에 아직도 잽이나 날리는 수준이었다.
"며칠 빠지셔서 못 들으셨겠지만 오늘은 미니 스파링을 할 거예요." 관장이 말했다.
'아… 오늘 잘못 나왔네.' 아들까지 데리고 왔는데 괜한 망신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쨌든 이제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앞팀의 스파링이 끝나자 관장은 눈짓으로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링 위로 오르며 아들을 쳐다봤다. 녀석은 생경한 장면에 긴장했는지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상대의 체급은 두어 단계 낮았지만 탄탄한 근육질 몸매인데다 가볍게 펀치를 휘두르는 모습만으로도 배 나온 40대 아저씨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젠장, 도망갈 구석도 없겠구먼... 이판사판이다. 싸움은 기세라고!'
"땡!"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상대의 몸짓은 가벼웠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엉키면서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쉴새 없이 날아드는 잽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수치심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잔뜩 약이 올라 철창을 흔드는 고릴라처럼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런 허술한 공격에 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퍽!" 상대의 펀치가 헤드기어를 넘어와 두개골을 때렸다.
"힘들면 그만하셔도 됩니다." 링밖에서 관장이 외쳤지만, 아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다시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일방적으로 당해버린 나의 첫 번째 스파링이 끝났다. 무기력한 아빠모습에 실망했을까봐 아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허탈하게 링에서 내려오는데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녀석은 환하게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아빠가 제일 멋져요"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아들 반응에 놀라 재차 물었다. "진짜?"
"우리 아빠가 제일 잘해요"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이 조그만 녀석이 어떤 순간에도 끝까지 아빠를 믿고 응원해 주었다.
그날의 오묘하게 충족된 감정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사이 나의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젠 컸다고 아빠에게 말도 잘 안걸지만 "아빠가 최고예요", "아빠가 제일 멋져요" 라는 녀석의 적폭적인 응원을 다시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