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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은 사람을 증명하지 않는다

by Shadow Tipster

불현듯 서랍을 연다. 몇 년 전 받은 명함들이 뒤엉켜 있다. 명함의 모서리는 구겨졌고, 글자는 바랬다. 그러나 그 안의 이름과 직함만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다. 나는 그 종이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이 명함을 내밀던 사람들은, 나와 어떤 관계였던가.


사회초년병 시절, 나를 소개한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내 회사였다. 내가 아니라, 내가 속한 조직이 먼저 인사를 했다. 거래처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 손이 아니라, 내 뒤에 어른거리는 회사의 간판을 잡았다. 우리는 그 착각 위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용기를 내어 퇴사를 선언했을 때,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냥 있어... 네 명함이 사라지면,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거다."

그 말은 본질을 찌른다. 명함이 없다면,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관계 따위 애초에 없었다는 것. 관계처럼 보였던 것은 소속의 빛에 의해 비춘 착시였다는 것.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가늠한다. 명함 한 장은 신분증이며, 지위의 인증서이며, 소속 증명서다. 사람은 지워지고, 직함만이 남는다. 오늘은 대리, 내일은 과장. 직함이 커질수록, 사람은 작아진다. 허리는 더 숙여지고, 어깨에는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올라탄다.


명함은 자유의 징표가 아니라, 복종의 명찰이다.


이 사회는 명함을 필요로 한다. 취업준비생에게도, 아르바이트생에게도, 가끔은 무직자에게조차 명함이 요구된다. 소속되지 않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취급받는다. 인간은 이름을 가지기 전에, 먼저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 명함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를 의심받는다. 이름이 아니라 직함으로, 사람이 아니라 소속으로 세상을 산다.


첫 명함을 받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 명함은 설렘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명함은 족쇄가 되었다. 작은 종이 한 장에 쌓이는 것은 기대, 책임, 때로는 굴욕이었다. 우리는 명함의 무게를 견디며 스스로를 소모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명함을 내려놓는다. 그제야 알게 된다. 명함 없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명함이 사라지면, 관계도 사라진다. 웃음도, 악수도, 안부도 모두 명함에 부속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묻는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과연 진짜 관계였던가. 아니, 우리는 단지 종이를 주고받았던 것 아닐까. 우리는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소속을 만났다. 기대를, 이해관계를, 필요를 만났다.


명함은 관계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종종 관계의 끝을 담보한다.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관계의 기한도 끝난다.

진짜 인연은 직함이 아니라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름 따위에 관심이 없다. 직함이 없으면, 인사는커녕 존재조차 부정된다. 직함이 높으면 경청하고, 직함이 낮으면 무시한다. 직함이 사라지면 연락을 끊고, 직함이 새로 달리면 다시 다가온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마다 우리는 계산한다.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을까. 혹은, 나를 끌어줄 사다리가 되어줄까. 그렇게 우리는 관계를 구축하지 않고, 거래를 맺는다. 서랍 속 명함들은 그 거래의 흔적이다. 거래가 끝나면, 종이는 쓸모를 잃는다.


문득 궁금해진다. 앞으로 내게 남은 명함은 몇 장이나 될까. 그리고 진짜 내 이름을 기억해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명함의 가치는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신분증처럼 휘두를 것인가, 아니면 만남의 시작으로 삼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조차도 한심하다. 어차피 세상은 결과만 본다. 명함 없는 자를 기억하는 세상은 없다. 그래도 명함을 건넬 때, 한번쯤은 생각해본다. 이것이 종이의 교환이 아니라 마음의 교환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기대는 금물이다. 이 세계는 소속을 사랑하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명함은 결국 사라진다. 서랍 속에 처박히고, 세월에 퇴색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그저 어딘가에 속했다는 빈 껍데기뿐이다.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소속을 자랑하고, 이름을 잃는다. 그러니 오늘 명함을 건넬 때, 상대가 나를 이름으로 기억할 가능성은 거의 없음을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사실을 슬퍼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명함이 사라진 후에도 남는 무엇인가를, 어쩌다 마주치는 소수의 순간을 위해.


사진: UnsplashGiorgio Tro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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