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때의 온도

시절인연

by Shadow Tipster

물 묻은 손을 어쩌다 바지에 닦다가, 바짓단이 축축해진 걸 늦게야 알아차리는 때가 있다. 어떤 인연은 그렇다. 스치듯 지났는데, 어딘가 젖어 있다. 반면, 어떤 인연은 바람 같아서, 스친 건지, 상상한 건지도 모를 만큼 조용히 지나간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사람을 만나고, 또 잊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 있었던 것처럼.


처음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반짝인다. 그 반짝임은 말투 하나, 눈썹의 방향 하나에도 묻어난다. 그 사람이 웃을 때 나는 괜히 마음이 놓이고, 그 사람이 조용할 땐 이유 없는 궁금증이 인다. 나와 닮은 점을 발견하면 왠지 안도하고, 다른 점을 발견하면 괜히 경이롭다. 대화가 이어지고, 웃음이 쌓이고, 익숙해진다. 그러다 착각한다. 이 사람은 오래 곁에 있겠구나. 하지만 착각은 어김없이 유통기한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이 새로움을 덮는다. 익숙하다는 건 좋지만, 그만큼 무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주던 따뜻함이 ‘원래 그런 거’가 되고, 작고 사소한 단점이 점점 크고 선명해진다. 기대는 현실과 충돌하고, 실망은 생각보다 더 조용히 스며든다. 예전에는 배꼽 잡고 웃던 농담이, 어느 날엔 그냥 흘려들어진다. 연락은 뜸해지고, 만남은 어색해지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멀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온도가 있다. 어떤 온도는 쉽게 식고, 어떤 온도는 오래도록 데운다. 처음엔 뜨거웠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미지근해지고, 결국 차가워진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특별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감’으로 계산한다. 그 거리는 자라서 침묵이 되고, 결국 인연이던 것이 과거형이 된다.


그런 과거형 인연이 생각보다 많다. 교실 구석에서, 복도 한 편에서,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우리는 매일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어떤 만남은 짧고 진했고, 어떤 만남은 길었지만 희미했다. 하지만 의미 없던 인연은 없다. 길든, 짧든, 지나간 모든 만남은 우리에게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은 다 다르다. 어떤 건 흉터가 되었고, 어떤 건 주름이 되었다. 웃음이었든, 눈물이었든, 고백이었든, 침묵이었든, 그 흔적들은 우리의 오늘을 만든 재료들이다. 지금의 내가 된 건, 그 사람들 덕분이다. 고맙거나, 아프거나, 그냥 스쳐간 이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가끔 문득, 아무 맥락 없이 누군가가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엔 후회보다 감사가 먼저였으면 좋겠다. 미워하지 않고, 잊지 않고, 그냥 그때의 장면을 고이 떠올리는 것. 그 사람을 이해하진 못했어도,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을 부정하진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한때의 인연은 사라지지만, 그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일. 어쩌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성실한 작별인지도 모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의 강점은 왜 늘 희망사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