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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인 ‘척’하는 사회

by Shadow Tipster

누군가 말했다. 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민주시민인 척한다.” 귀밑이 시큰했다. 익숙한 감각이다. 한국 사회에서 집회에 나선 사람들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뉜다. ‘깨어 있는 시민’과 ‘선동당한 군중.’ 문제는 그 기준이 늘 보는 이의 심기와 상상력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깃발 하나를 보고도 성급히 비웃는다. 그 깃발이 어떤 의미로 흔들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 사람들은 틀렸다”는 감정만이 앞선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다. 우리는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늘 똑같은 방식의 분노와 똑같은 언어의 참여를 요구한다. 집회는 패션쇼가 아니다. 깃발이 눈에 거슬린다고 해서 그 자리에 선 시민들의 목소리마저 지워져야 하는가.


집회의 본질은 스타일이 아니라 맥락이다. 동기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분노로 나왔고, 누군가는 실망으로 나왔으며, 또 누군가는 그냥 따라나왔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자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매번 완벽한 결론을 갖고 광장에 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때로는 침묵을 깰 필요 때문에, 우리는 거리로 나간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문제는, 이런 목소리들이 무력감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정치가 기능을 상실한 사회에서는 분노도 체념으로 귀결된다. 공약은 기억되지 않고, 약속은 정권과 함께 사라진다. 유권자는 점점 무뎌지고, 정치인은 점점 능숙해진다. 그러면서 정치는 특권화되고, 참여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쯤 되면, 냉소는 저항이 아니다. 냉소는 기득권의 방패다.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게 정치는 소수의 놀이터가 되고, 시민은 방관자로 밀려난다. 투표란, 결국 “누가 덜 나쁜가”를 고르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책임을 질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정치인은 다 똑같지 않다. 누군가는 힘든 길을 택하고, 누군가는 쉬운 길만 걷는다. 문제는 우리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있는가다.


절대군주를 그리워하는 시대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애민을 약속하는 대신, 감시를 요구한다. 권력은 스스로 길들여지지 않는다. 시민의 눈길과 질문, 그리고 때로는 거리의 외침이 필요하다. 불편함은 정치의 본질이다. 모두가 편안한 정치는, 대개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워진 정치를 뜻한다.


그러니 조롱하지 말고, 참여하라.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정치란, 우리가 개입한 만큼만 움직이는 낡고 고장난 기계다. 그 기계를 두드리는 일은 피곤하지만, 필요하다. 깃발 하나를 보고 비웃는 대신, 그 깃발이 왜 거기 있었는지를 묻는 일. 그 질문이야말로, 진짜 시민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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