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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으면 남도 싫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에 대하여

by Shadow Tipster

어릴 적, 동네 문방구 앞 뽑기 기계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꽤나 지난한 과정이었다. 내 차례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녀석이 동전을 쓱 밀어 넣고는 먼저 레버를 돌려버린다. 속에서 천불이 나지만, 덩치가 산만 한 녀석이라 찍소리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굴렀던 기억. 그때의 그 억울함과 분함. 아마 누구나 비슷한 경험 한두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당하면 기분 나쁜 일.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종종 그 산만 한 덩치의 녀석처럼 행동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내가 싫다면 분명 남도 싫을 것’, ‘내가 귀찮다면 분명 남도 귀찮을 것’. 이 얼마나 명쾌하고 아름다운 대칭인가.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까지 갈 것도 없다. 다섯 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법한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왜 이리 쉽게 잊거나 외면하는 걸까. 아마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안일함과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속물근성 때문일 것이다. 혹은 ‘나는 좀 특별하니까’라는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분리수거 날을 생각해 보자. 온갖 종류의 플라스틱과 비닐이 뒤섞인 봉투를 슬그머니 내놓으며 ‘에이, 설마 나 하나 때문에 큰일 나겠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남들이 애써 지키는 규칙 위에서 나 홀로 ‘귀찮음’이라는 비용을 절감하며 무임승차하는 셈이다. 얌체같이 끼어드는 자동차, 공공장소에서 주변 사람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모습, 익명성에 기대어 함부로 쏟아내는 온라인 댓글들. 모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의 발로다. 내가 그 끼어들기 차량 뒤에서 답답하게 기다리고 있다면, 내가 그 통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면, 내가 그 악플의 대상이 되었다면 과연 그때도 ‘로맨스’일까?


‘왜 해야 할까?’, ‘어떻게 할까?’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종종 ‘비즈니스 논리’라는 편리한 가면을 꺼내 든다. 효율성, 가성비, 속도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로 포장하며 기본과 원칙을 슬쩍 옆으로 밀어둔다.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저버린다. ‘하나만 알고 둘, 셋은 모른 채 까부는 경우’라는 표현이 이토록 적절할 수가 없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더 큰 가치, 이를테면 신뢰, 공동체 의식, 지속 가능성 같은 것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것이다.


결국, 답은 간단하다. ‘기본을 지키면 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면 되는 것이다. 줄을 서야 할 땐 줄을 서고, 쓰레기는 분리해서 버리고, 약속 시간은 지키고, 타인의 입장을 한 번쯤 헤아려보는 것. 이런 기본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사회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창한 담론이나 복잡한 시스템 개선 이전에, 바로 이 ‘기본’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기본을 지키는 일이 때로는 손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만 바보같이 규칙을 지키는 것 같아 억울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나 하나쯤이야’ 하고 기본을 내팽개친 사회를 상상해 보라. 그곳은 아마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각자도생해야 하는, 생각만 해도 피곤한 세상일 것이다.


그러니 오늘, 문방구 앞 뽑기 기계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새치기하는 녀석에게 “야, 너 줄 서!”라고 당당하게 외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그 녀석처럼 되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자,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첫걸음일 것이다.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싫은 건, 남도 분명 싫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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