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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worker Feb 06. 2024

내게 가장 민감한 감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감각의 향연이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그리고 때때로 언급되는 신비로운 육감까지. 그러나 감각의 민감함은 그날의 상황과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여행지 숙소의 이상야릇한 냄새 때문에 후각이 너무 발달했나 싶다가도 중국 출장길 처음 맛본 향신료에 비위가 상해 일주일 내내 맥도널드 햄버거만 사 먹었던 기억을 생각하면 미각이 좀 더 민감한 것 같기도 하다. 새로 산 셔츠의 티끌만한 실밥이 하루 종일 피부에 거슬려 끝내 새로 셔츠를 사서 갈아입을 때는 난 정말 촉각이 예민한 놈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각과 관련한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30대 후반 즈음의 어느 주말. 평소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거실에서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데 엊저녁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PC가 있는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다 죄 없는 벽에 이마를 쿵 찧었다. 혹이 볼록하게 솟았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지만 다 큰 어른이 애들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저녁, 책상 앞에 앉아 출력된 문서를 읽는데 눈앞에 무언가 자꾸 아른거렸다. ‘집안에 날파리가 생겼나?’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예사롭지 않은 문제란 걸 인지한 건 다음 날. 책을 읽는데 날파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날파리들은 제멋대로 날아다니지 않고 나의 시선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눈 속에 뭐가 들어갔나 보다. 하루 이틀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개구장이 스머프에 심술궃은 가가멜처럼 생긴 안과 의사는 비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병은 아니고 노화입니다. 눈도 다른 신체와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으면 노화가 됩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어요.”

 

“비문증이요? 그리고 저 아직 30대인데 노화라니요?”

의사는 자비 없이 말했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한테도 종종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아무튼 이게 치료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적응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치료가 안 된다고? 그냥 적응하라고?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의료기술이 발달한 세상에 죽을 때까지 눈에 날파리를 넣고 살라고?  황당하다 못해 대낮에 눈뜨고 털린 기분이 들었다.

“제가 며칠 전에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데 혹시 그거 때문 아닌가요? 다시 한번 잘 좀 살펴봐 주세요.” 하지만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노화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적응하라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고칠 수 없으니 그냥 살라는 한마디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책을 펼쳐도 모니터를 켜고 작업을 할 때도 가을날의 풍광 속에서도 날파리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심지어 눈을 뽑아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무렵 강남역 OO 안과에서 비문증 치료를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새로 찾은 병원의 안과검사는 다를 게 없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젊은 의사는 말했다. “비문증 맞습니다.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지만 도움이 될 수 있는 약을 처방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6개월쯤 드셔보시면 호전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수술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앞을 보기 힘든 정도의 증상이 아니라면 권하긴 어렵습니다. 매우 위험한 수술이거든요.” 나는 수술이 잘못되면 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보다 비문증이 악화 될 수 있다는 말이 더 무서웠다. 그나마 약을 처방해 주고 좋아질 수 있다는 의사선생의 설명이 위로가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양제 같았던 그 약이 효험이 있길 바라며 버텼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약통이 다 비워져 갈 때쯤 비문증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약의 효능은 없었지만 그 사이 눈이 비문에 적응했기 때문에 미칠 것 같이 신경 쓰였던 날파리는 어느새 일상의 동반자 같은 존재로 변해버렸다. 어떠한 고통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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