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여태까지 고생해준 나.
올해를 시작하면서 나쁘지 않은 2021년이 되기를 바랐다.
그냥 그저 그래도 괜찮으니까 최악인 해로 남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다.
민형사 소송을 진행하려고 준비를 하고 이직을 하고 새로운 삶들을 준비하고 그러면서도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2021년은 나에게 최악의 해라고 남기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소망하고 소원했다.
올해 6월, 개명 신청을 했다. 점, 미신 이런 건 믿지 않았지만 정말 최악이던 해를 지나가면서 혹시나 해서 봤던 이름 풀이에선 흉, 흉, 흉, 그리고 또 흉, 최악, 최악이라는 단어들만 보였다. 정이 많다는 내 이름은 실제로도 정이 많아서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받고, 그래도 상처를 받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해버린 개명 신청은 소명자료를 요구했다. 지난번 직장에서 엮여버린 고소 진행건 때문에 개명에 대한 추가 소명자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민사 소송에 대한 고소장부터 이것저것 준비해서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보냈지만 그래도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몰라서 4개월 동안 발만 구르고 있던 나에게 갑작스레 '개명 허가'가 떨어졌다.
6월부터 나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닭살 돋고 느끼하다며 부르지 않는 친구들이 많기는 했지만, 새로 만난 인연들, 내 이름을 가장 많이 불러주는 그들이 매일매일 내 새로운 이름을 불러줬다.
그러다 예상치 않은 문제로 급작스럽게 퇴사를 하고, 어차피 쉬는 동안은 나를 온전히 느끼면서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로하고 오롯이 휴식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 때문에 취업 사이트를 뒤적거렸고 면접을 봤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면접을 보던 대표님은 내가 거진 1년간 '2주 간의 생활'을 전하고 위로를 받던 의사 선생님과 비슷했다. 면접 공포증이 있는 나지만, 굉장히 편하게 면접을 봤고 그 주 수요일부터 출근을 하기로 했다.
수-금, 3일 일을 했고 주말 동안 많은 생각 속의 나는, 돈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집 근처, 회사 근처의 호프집과 식당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볼 준비를 했다. 코로나로 인해 보건증 발급을 하지 않는 곳들도 있다고 해서, 발급이 가능한 병원들을 찾기도 했다. 투잡을 못하게 하는 회사가 있기에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 대표님에게 투잡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던 대표님은 괜찮으면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셨다.
저녁을 먹자고 한 이유는, 내가 어떤 이유에서 투잡을 하려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부모님의 이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엄마의 재혼, 믿었던 사람으로 인한 고소, 아버지의 투병 생활 등.
내게 그것들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당연히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일이다. 보통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많지 않기에 다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냥 내가 겪어온 사실들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짧은 기간 안에 업무 능력을 인정하고 체력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며 연봉을 인상해주시겠다고 했다. 전 회사와 비교했을 때 거의 1,000만 원이 오른 연봉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능력을 보여주려 노력한 나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만, 그 능력을 오롯이 인정하고 사람에게 투자를 해야지 회사가 발전한다며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준 대표님에게 큰 감사함을 느꼈다. 회사에서 시켜서 하는 야근이 아닌, 나 스스로의 워커홀릭 기질을 보여주면 그대로 인정하고 그만큼 대우해주는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이제 2주가량 된 시점에 1년 뒤의 내 글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사람 가리는 옆사람도 대표님이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는 거 보니 이제 내 인생은 꽤 괜찮아질 것 같다.
2월에 접수한 고소장이 여러 가지 이유로 도달하지 않다가, 구글에서 뒤적거리다 혹시나 하고 보낸 곳에 도달을 했고 지금은 답변서를 기다리고 있다.
엿같고 규칙 없던 회사에서 즉흥적으로 퇴사를 하고 나왔는데 나의 능력을 너무나도 알아주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
보통 2-3개월이면 끝난다는 개명이 6개월이나 걸렸고 어떻게 소명자료를 제출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개명 허가가 떨어졌다.
30년이 넘는 삶을 사는 동안 쉽지 않았고, 행복했던 순간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던 나에게 이렇게 행복하고 기쁘고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 오기도 한다는 게 오히려 의심스럽기도 했다.
최근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아픈 꿈을 꿨다. 흔히 '루시드 드림'이라고 말하는, 꿈에서 꿈을 인지하는 '자각몽'을 꾸는 나는 2일간 이어지는 꿈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꿈도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 또 이어서 꾸어야 한다니,라고 생각하고 잠시 후.
사실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현실이 꿈이고,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이 꿈이 현실이지 않을까.
내가 너무 행복하고 싶어서 그저 현실처럼 느껴질 만한 그런 꿈을 꾸면서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내 현실이 이렇게 행복할리 없는데, 사실은 이 지옥 같다고 느끼는 꿈이 '현실'이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의심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지금 어지간한 일들은 다 괜찮다고 느낄 만큼, 그런 정도로 괜찮다.
30년이 넘는 인생 중에 최소로 잡아 30년은 불행하다고 매년이 최악이라고 생각했지만
2021년은 꽤나 괜찮은 해였다. 내 기억 속에 적어도 최초로 최악이라는 말은 쓰지 않을 것 같은 해였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느꼈던 고통들을 생각하며 남들에게 그 감정을 전하고,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성장해가고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있다.
억지로 성장할 필요도 없고,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는 나, 라는 상태로 스스로 자라나고 있고 보듬고 사랑하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토닥거리고
내일은 좀 더 나을 거라고, 안아주는 나에게 감사하며.
그래서, 지금 굉장히 힘든 너도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당신도
괜찮은 내일이 올 거라고,
오늘도 숨 쉬느라 너무 고생했다고
꼭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