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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월 whalemoon May 14. 2024

두 달도 되지 않아 퇴사 한 이유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라고요?

 오랜만에 쓰는 회사 이야기. 작년 5월 퇴사를 한 이후로 일을 하지 않았다. 실업급여도 나왔고 일을 해야 할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일을 할 곳을 꾸준히 찾아보기는 했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경력 8년 정도 되는 마케터이고 30대 중반인 나는 연봉이 엄청 낮은 편은 아니었지만, 원하는 연봉을 주는 회사가 없었다. 재택근무를 1년 넘게 했었기에 재택을 하는 회사를 찾고 싶었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블라인드나 잡코리아에서 보는 회사의 리뷰들도 다 별로였다. 크게 급하지 않았지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다.


 이력서를 올려두다 보니 종종 취업 제안이 오기도 했는데, 내가 맥시멈으로 생각한 지역에서 살짝 빗겨나가 있었다. 교통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곳에 살고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원치 않았다. 종종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공황장애 때문에 대중교통을 오래 이용하는 것도 어렵고, 여러 번 갈아타는 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기존 연봉에서 150% 이상 올려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회사에 마케터 자리가 나왔으나 보기 좋게 서류에서 광탈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것이 문제일지, 혹은 잦은 이직이 문제일지 잠깐 고민했으나 어차피 떨어진 거 고민해서 뭘 하겠는가.


 그러던 중 올해 1월, 꽤 큰 마케팅 회사를 하나 찾았다. 위치도 나쁘지 않았고 스타트업이라 자유로운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어린 친구들이 많고 직원을 소모품처럼 자주 갈아치운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경력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리더급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수습기간 이후에) 이력서를 보냈고, 1시간이 넘는 면접을 봤고 출근을 결정했다. 야근이 많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야근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점심을 대충 때우고 일을 하는 성격이기에 내가 잘 끝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건 큰, 아주 큰 착각이었다.


 입사 첫날, 다른 직원들보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는 유일한 날이었다. 내 퇴근시간이 되도록 퇴근하는 직원들이 없었다.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주니어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정도 30-60분 정도 일을 더 하면서 회사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사실 남편과 퇴근시간을 맞추려면 굳이 정시퇴근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업무 인수인계를 받던 중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던 직원이 퇴사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인수인계를 했구나, 생각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거래처였는데 마케팅 비용이 꽤나 컸다. 그 회사는 혼자서 맡아 진행했는데 일을 할수록 전 직원이 왜 퇴사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퇴근시간 5분 전에 업무를 넘겨주는 건 기본이고, 매주 진행되는 대면 미팅 이후로 업무 방향이 계속 바뀌었다. 알고 보니 그 미팅 자체도 내가 입사하기 바로 전주부터 시작됐다고 하는데 주먹구구방식의 미팅이었다. 심지어 단순 대행이 아니고 대행사가 하나 더 있는, 즉 나는 대대행을 맡은 상황이었다. 고객사와 대행사에서 나에게 끝없는 일을 던져줬다. 뭐 대행사가 야근하는 거나 일이 많은 건 겪어봤고, 대대행도 이미 경험해 봤기에 하나하나 다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60분 내면 모두 해결하고 퇴근할 수 있었다.


 하. 지. 만.

 매주 월요일 대행사와의 미팅, 그 미팅을 토대로 주간보고서 작성, 화요일 고객사와 미팅. 화요일 미팅 이후엔 주간보고서도 쓸모없어지고 전부 다 뒤집어 새로운 일들이 생겼다. 월요일엔 도대체 왜 미팅을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월요일, 화요일마다 2-3시간씩 시간을 사용했다. 오전 미팅 이후에 대행사의 요청에 따라 주간보고서 틀을 바꾸다 보니 야근 시간이 갑자기 길어지기 시작했다. 보고서만 작성하는 게 아니라 당일에도 고객사, 대행사의 일을 처리하는데 그게 나 혼자다 보니 업무 과중이 되어가고 있었다. 밤 11시 정도 주간보고서까지 모두 마치고 퇴근, 아침에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와서 고객사로 이동하고 화요일 미팅. 3시간 정도 미팅 후에 다시 1시간 정도 걸려서 회사로 복귀. 점심은 거르고 커피를 마시며 다시 일을 시작. 미팅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한 뒤 데일리 보고, 방향성 바뀐 것에 따른 광고 제작, 광고 세팅, 금주 목표 설정 등. 고객사나 대행사에서 본인들끼리 대화 후 바뀌는 것들이 일주일에 10번이었다. 열심히 제작된 콘텐츠들을 엎어버리고 기획하고 제작하고 세팅하고 데일리 보고하고 엎어버리고 기획하고 제작하고 세팅하는 행동을 일주일 내내 반복했다.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걸러가면서 일을 해도 퇴근시간이 10시 11시가 되어갔다. 집에 들어가면 매일 잠을 자는 남편의 얼굴을 봐야 했고, 난 지쳐 쓰러졌다.


 월간보고서를 작성하던 날, 새벽 3시가 넘어서 퇴근을 했다. 심지어 다음날은 거래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혼자서 업무를 처리했고, 대행사에서는 3-4명이 붙어있었다. 고객사에서 요청하는 것이 점점 늘어나고 대행사에는 또 다른 사람이 붙었다. 프리랜서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붙고 나서 보고서 양식이 또 바뀌었다. 설 연휴기간에 회사의 전화를 받았다 바뀐 방향성에 대해, 내가 인수인계받지 못했던 상황에 대해. 사실 전임자도 본 고객사를 한 달도 안 맡고 퇴사를 결정했던 것이라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할 수 없었지만, 결론적으론 지금 맡고 있는 내 잘못이 되었다. 남은 설 연휴를 찝찝하게 보냈고 출근을 하는 데 숨이 턱턱 막혔다. 지하철에서 어지럼증이 시작됐고 회사에서는 두통과 울렁거림이 계속됐다. 난 이 고객사 말고도 맡고 있는 고객사가 3개가 더 있었다. 총 4개의 고객사를 혼자서 다 쳐내야 하고, 압박은 계속 됐다. 버티자, 할 수 있다, 하면서 일을 했다. 금요일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퇴근 후에는 새벽 4시 넘어서까지 일을 계속했다. 대행사에서 요청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그렇게 일을 했는데, 일을 끝낸 사람은 나뿐이었다. 목요일 저녁 9시쯤에 일을 주면서 토요일 낮 12시까지 끝내달라고 했다. 엄청나게 무리한 스케줄이었지만 끝냈다. 나만. 대행사는 4명 이상이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확인했을 때도 일이 끝나있지 않았다.


 이렇게 업무를 하게 된 건, 내 상사가 이사였고, 대행사 이사와 친분관계가 있었고, 업무를 무리하게 받아왔고, 분배를 제대로 하지 않고 경력자라는 이유로 모두 떠넘긴 것 때문이었다. 월요일 출근길에 문득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게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 나면 회사에 안 가도 될 텐데.'


 사실 회사를 관둘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그에 대한 생각을 계속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퇴사를 고민할 시간조차 없이 바쁜 한 달 반정도의 시간을 보냈는데, 운전하고 있다가 문득 든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우울증을 오래 겪었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해봤지만, 지금 나는 꽤나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금방 해소했고 사실 스트레스 자체를 많이 받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라고 넘기고 있던 내가 스스로 사고가 나길 바라는 생각을 했다. 굉장히 좋지 않은 증조였다. 이런 생각들이 계속되면 어떤 생각들이 내 머리를 지배할지, 그 생각들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출근길에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회사에 가서 면담 신청을 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역시 붙잡았고, 6개월 뒤 연봉 딜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정말 똑똑한 친구 둘을 얻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너무 똑똑해서 존경스러웠고, 그 친구 덕분에 나도 더 열심히 하고 다른 걸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업무를 하는 도중에 비딩을 위해 주말 풀 출근도 하며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갔다. 그 시간이 즐거웠고 그 친구 때문에 그만두지 않을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내 정신을 좀먹어가는 회사에서 버텨야 할 필요성은 없었다.


 후임으로 들어온 직원 역시 나와 비슷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난 그 후임을 위해 데일리 보고, 주간 보고를 자동화시켰고 인수인계를 모두 마친 뒤 퇴사를 했다. 53일 근무 후 회사를 등지고 나왔다. 짧은 기간 동안 좋은 사람을 얻었고, 스트레스를 얻었고, 더 늘어난 업무 스킬을 얻었다.


 여러 회사를 다녀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상대방을 존중해주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본인들이 늦게까지 일한다고 해서 타인도 당연히 그 시간까지 일해야 한다는 마인드는 옳지 않다.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밤, 새벽, 주말에 주로 일을 하던 대행사의 사람은 평범한 직장인이 일하는 시간엔 답을 하지 않고, 늦은 밤이나 새벽에만 연락을 해왔다. 재촉을 하고 화를 냈다. 갑질 마인드로 타인을 비판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매번 10시, 11시 퇴근이 익숙해졌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간 시간보다 야근 이후 탈 수 있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간 시간이 더 많았다. 퇴근 후에는 OFF 하기 위해 따로 마련했던 업무폰도 끄지 못했다. 오히려 손에 더 들고 있어야 했고 꿈에서도 일을 해야 했다.


 내가 '내'가 아니라 '직장인'의 캐릭터가 강해지면,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매번 늦게 들어와서 혹은 새벽에 조용히 들어오고 주말이면 죽어있다가 회사 핸드폰 울리는 소리에 잠 깨는 나를 보며 걱정하는 모습에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소한 것이 다 스트레스가 되었다.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필요는 없고, 그럴수록 나는 나를 더 존중해줘야 했다. 그래서 빠르게 퇴사를 결정했고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 회사에 들어갔지만, 난 그냥 좋은 '내'가 되기로 했다.


 이렇게 이력서에 포함하기도 애매한 53일의 경력만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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