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부터 02시까지
아픈 강아지를 24시간 케어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아이를 유치원에라도 보내고 일을 하려 했지만 적당한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어지니, 마음의 여유 역시 사라진다. 돈 문제로 서로의 기분이 언짢아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집이 불편해진다.
매일매일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 스크롤만 연신 내리던 어느 날, 집 근처 편의점 아르바이트 공고를 발견했다.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우리 동네는 유난히 편의점이 많다. 거의 두 세 골목에 하나씩 편의점이 있다. 근처에 공장도 많고 외국인 노동자도 많고 주택들도 많다. 그 많은 편의점 중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곳을 지난 두 달 동안 발견하지 못했는데 때마침 올라온 공고를 내가 발견했다.
시급은 만 원,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 17시부터 02시까지. 걸어서는 10분 정도 되는 거리였고 차로 가면 2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 토요일에 남편이 일을 해도 집에 도착하면 16시가 조금 넘기 때문에 강아지 케어 교대 가능. 바로 이력서를 넣고 남편 퇴근시간에 맞춰 면접을 보러 갔다. 편의점 주변에 원룸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 1인 가구이거나 평일만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새벽 2시에 문을 닫고 5시에 다시 연다고 했다.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잠수를 타서 급하게 사람을 구하는 중이었다. 하루에 9만 원, 2일이면 18만 원. 주말이 10번인 달이면 90만 원. 아이의 병원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돈. 어차피 새벽 2-3시에 잠드는 올빼미형 인간인 나에게 최적의 조건이었다.
20살, 짧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시작한 첫 아르바이트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근무하던 곳은 초, 중, 고등학교와 학원가가 있는 곳에 위치한 편의점이었고 오후-저녁 시간에 일을 했던 나는 하교하는 아이들과의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최저시급이라는 개념도 부족했고 시간당 2,500원 정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벌써 16년 전이다. 당시 법적으로 정해진 최저 시급은 3,770원. 하지만 어느 편의점이나 당연한 듯 최저시급을 맞춰주는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담배값이랑 친구들하고 마실 술 값이나 조금 벌자는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엉망진창으로 라면국물을 쏟거나 담배를 물고 편의점에 들어오는 취객들이 아닌 이상 꽤 재미있게 일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20분 정도 면접을 보고 16년 만이면 포스를 다루는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테니 내일부터라도 나와서 조금씩 일을 배우라고 했다. 면접을 보자마자 바로 합격. 돈이 급한 나에게는 그저 좋은 일이었다. 강아지와 함께 출근을 해도 된다고 했다. 남편이 아이를 볼 수 없을 때는 함께 출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최고의 조건이었다. 일을 배우는 동안은 시급을 50%만 준다고 했지만, 그거야 내가 빨리 배워버리면 그만이니 그냥 수긍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우리 부부는 오롯이 함께하는 시간이 보통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그때 여행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평일에는 남편이 워낙 피곤해하고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보니 우리는 늘 토요일 남편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간은 적어도 당분간 즐길 수 없다.
목요일에 면접을 보고, 금요일 11시. 오래 일한 직원이 있는 시간에 나가 일을 배웠다. 사실 2-3시간 정도만 듣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물류 들어오는 것도 보려다 보니 17시에 일이 끝났다. 6시간 일을 해도 내 손에 들어오는 건 35,000원. 나름 고급인력이라 자부하던 사람인데 보통 다니던 직장에서 1-2시간이면 벌 돈을 6시간을 일하고 벌었다. 월급제로 주다 보니 이 돈마저 다음 달에 내 손에 들어온다.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일은 나름 재미있었다. 포스기를 잠시 보고, 첫 손님부터 계산을 했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역시 ‘일’을 하는 것은 내 적성이라고 생각했다.
금요일과 토요일, 올림픽과 축구(뮌헨 VS토트넘)를 보며 쉬고 일요일 21시 30분. 내가 일하는 시간에 들어오는 물류에 대해 배우러 편의점에 들렀다. 한 30분 정도만 보고 집에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오늘 마감을 하라는 점장님. 달랑 핸드폰만 들고 왔던지라 잠시 당황했지만 4시간 반 일을 하면 45,000원이 생긴다. 남편에게 전화해 일을 하고 들어갈 거라 말하고 텅 빈 편의점에 홀로 앉아 전자책을 읽었다. 9시간 편의점에 있는 동안 하루에 적어도 2권 정도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며 좋아했었다. 비록 지금은 전자책 기기가 아니라 핸드폰을 들고 읽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손님도 꽤 있어 나름 괜찮은 4시간 반을 보냈다.
12시에 인수인계 시제 점검을 한 번 더 하고, 유통기한 지난 폐기 음식을 빼고, 청소를 하고, 문을 잠근 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2시 10분. 늦은 시간에 들어온 내가 이상한 듯 연신 나를 따라다니는 강아지와 교감을 하고 자려고 누웠다. 편의점에서 마신 커피 탓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일을 해서 기분이 좋은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새벽 5시 반까지 계속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다시 집안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내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든다. 원래의 나였다면 버는 돈의 반도 안 되는 돈이지만, 책을 살 때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점에 안도했다. 아이가 아픈 순간부터 지금까지, 약 3개월의 시간 동안 머리와 심장을 옥죄어오던 ‘돈’이라는 스트레스가 아주 조금이나마 가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직장에 이력서를 넣고 있다. 괜찮은 조건으로 근무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유를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계속할 생각이다. ‘우리’의 시간은 당분간 줄어들겠지만, 당분간이니까.
역시 나는 일을 좋아하는 워커홀릭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