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누구나 다양하고도 중첩된 역할, 다중역할을 갖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시시콜콜한 것도 의지할 수 있는 맏딸"
나는 친구들에게 "에너지 넘치고 발랄한 친구“
나는 교수님에게 ”졸업하고 싶어하는데 공부는 왠지 안하는 것 같은 제자“
나는 논문 심사위원에게 ”논문을 소설처럼 쓰곤 하는 탈-학문적 학생“
나는 선배들에게 "잊을만 하면 연락하는 미워할 수 없는 녀석“
나는 소수의 동생들에게 "롤모델“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상습 연체자"
나는 동네 만화방에서 "우량 고객"
나는 동네 헬스장에서 "가끔 오는 손님"
나는 아이들에게 ”세상 전부“
다양한 역할은 때때로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합니다. 2020년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을 비롯해 방송가에 불어닥친 다중역할의 또 다른 이름 “부캐열풍”은 그 자체만으로도 에너지와 색다름의 표본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던 이효리씨가 아주 강렬한 화장과 함께 쎈언니 ‘천옥’이 되어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은 참 매력적이었고, 청중들에게 대리만족과 영감을 동시에 안겼지요. 재테크 시장에 불어닥친 “N잡러”열풍도 이러한 다중역할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면모라고 보여집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주말엔 평소 자신이 즐기던 베이킹을 좀 더 전문적으로 수행해 쿠키를 구워 앱을 통해 판매하며 부수입을 창출한다거나, 테니스를 치러 갈 때 입을 옷이 없어 자체 디자인해서 입고다닌 옷을 생각지도 못하게 많이 판매하면서 사업가로 발돋움하게 된 여러 사례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 역할 혹은 정체성 간의 갈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여성은 회사에서 멋진 커리어우먼이고 싶고, 아이들에게도 최고의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를 동시에 이루는 것은 쉽지 않지요. 최고의 직장여성과 최고의 엄마 사이 어딘가에서 협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은 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줄타기를 하는 모습과 유사해집니다. 그런데 역할 간 갈등관계가 첨예해지고, 애써 유지해온 균형이 무너져내리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극심한 다중역할 갈등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Ellen(2003)은 공부를 하는 성인들의 다중역할에 초점을 기울인 학자입니다. 그녀는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의 추가로 인해 성인들이 문화적·제도적 측면에서 다양한 압박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고 연구를 통해 밝혔습니다. 에둘러 성인학습자라고 표현하였으나, 대한민국에서 남녀 가사노동시간 차이가 2시간 17분에 이르고, 여성들이 아이돌봄 및 교육의 많은 부분들을 관리하는 현실에 기반할 때, 공부하는 엄마들의 고충은 공부하는 아빠들에 비해 몇 곱절 더 클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공부하는 엄마들의 다중역할수행에 대한 부담과 갈등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글을 써왔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이 엄마로서, 학생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겪고 그에 따른 역할갈등을 경험하고 있음을 객관적인 설문자료, 측정도구, 인터뷰 등을 통해 보고해왔지요(Haynes et al, 2012; 김은하 외, 2008; Johnson et al, 2007; Wellington & Sikes, 2006).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무엇보다, 역할갈등이란 상황은 공부하는 엄마들이 짊어지기에 너무 많은 역할을 맡고 있거나, 어떤 역할을 함으로써 다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합니다(Harmon-Jones, 2000). Augustine과 동료들(2019)의 연구에서는 다중역할로 심한 부담을 갖는 엄마들의 경우,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동안 더 많은 피로감을 느끼고 행복감이 덜한 것으로 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많은 역할 요구가 있을 때 역할 과부하가 초래될 수 있으며, 이러한 역할과부하는 다양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데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엄마들이 이러한 다중역할들을 충분히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는 연구도 존재합니다(Anaya, 2011). 역할갈등은 결국 공부하는 엄마들에게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정체성 혼란을 겪게 합니다. 때때로 대학원을 직장으로 여기지 않고, 대학원 생활을 단순한 ‘취미활동’ 정도로 이해하는 외부의 시선으로 인해 엄마 대학원생은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버는 워킹맘’과 ‘헌신적으로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 전업주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지요(Ellis, Erin Graybill, 2014).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엄마 대학원생은 좌절감도 함께 느끼게 되고 이러한 좌절감은 심각한 소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Lewis, 1971) .
다중역할은 엄마 대학원생의 시간 부족을 야기시킵니다. 여러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 대학원생은 자기 계발, 자기 관리 혹은 유급 노동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하게 되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육아와 유급 노동에 쏟는 시간 때문에 자신의 학업에 투자할 시간마저 부족해지는 모순적인 상황도 발생합니다. Jennifer & Kate & Daniela(2018)에 따르면 스터딩맘은 대학을 다니지 않는 엄마보다 하루에 23분 육아 활동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여가 시간을 하루에 53분 더 적게 보내며, 23분 더 적게 자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슬프게도 엄마와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은 자녀에게 심각한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Hibel, L. C., Trumbell, J. M. & Mercado, E. (2014)는 엄마가 근무하는 날과 근무하지 않는 날의 스트레스 수준을 비교하였는데, 엄마가 일하기 위해 일찍 기상하는 시간은 자녀에게도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엄마와 함께 하는 양질의 시간이 자녀의 비행 행동을 줄이는데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엄마와 자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연구도 존재합니다(Milkie, M. A., Nomaguchi, K. M., & Denny, K. E.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