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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팅게일 Dec 30. 2023

불친절한 간호사가 되었다(4)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4학년

남의 고통은 겪어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요란했던 3학년의 시절이 갔다.

산과 실습을 하며 생명의 탄생을 보기도 했고 수술실 실습을 통해 수술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암병동에서 실습하면서 무서움을 느끼기도 했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 편도 2시간 걸리는 지하철 출근길에서 새벽 공기를 맡으며 공부도 했었다. 3학년의 바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렇게 한 층은 성숙해진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이 되어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는 좀 더 있었다. 약간은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다. 같은 패턴의 실습은 지겨웠고 첫 실습의 설렘과 기대는 남아 있지 않았고 귀찮음만 남았다.

이제는 취업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4학년 1학기. 실습과 과제에 더해 '자기소개서'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원형탈모도 생겼었다. 티는 안 났지만 거의 반년을 끙끙 앓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취업과 학업을 쉼 없이 병행했고 이것이 나를 좀먹는지도 모르고 두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스트레스와 피로는 원형탈모에서 그치지 않았다. 새벽 2시 시험공부를 하던 나는 졸림을 참기 위해 양치질을 하던 중 왼쪽 귀가 막히며 소리가 안 들리고 이명이 심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3달간의 약 복용에도 호전되지 않던 이명은 2023년 지금까지 약 5년 정도 동반자가 되었다. 

그 당시 엄마도 양 쪽 귀의 이명소리에 고통받고 있었다. 엄마는 더 심한 증상으로 버스가 바로 옆에서 지나가야 이명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내게 이명 증상이 생기기 전 엄마의 투정과 신경질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참아봐 봐, 그렇게 힘들면 병원을 가봐". 지금도 공감은 참 나에게 힘든 부분이지만 그때는 매몰차다 느낄 정도로 감정이라는 게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명이 생겼을 때 비로소 엄마가 느꼈을 공포와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했으면 더했다고 생각이 든다. '이대로 앞으로 50~60년은 더 살 텐데.. 이명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고?' 이 생각이 들 때부터 약간의 우울감도 들었었다. 그때 의지가 되었던 건 엄마였다. 그 누구보다 내 증상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나도 비로소 그제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느꼈을 감정을 내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 쉬우면서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말. 간호사로서 필요한 덕목임을 이때 느꼈다. 쉽지는 않지만...


간호사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헌신하고 희생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헌신과 희생은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천은 더 어려운 부분이었다. 멋있어서, 좋아 보여서, 내가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시작한 간호학과 생활에 간호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4학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학년 여름방이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취업의 계절. 간호학과 4학년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계절이었다. 다른 이의 취업에 부러워도 하고 다른 이의 취업에 시기 질투도 하는 시기였다. 나는 꿈과 희망을 쫓아 서울권 병원을 지원하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서울에 가고 싶었다. 내 간절한 마음이 하늘이 가엾게 여겨 이뤄준 것인지 서울에 취업하게 되었다. 나의 간호를 실천할 수 있는 병원에 취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병원이 바라는 인재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여곡절 많은 간호학과에서의 3년을 뒤로하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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