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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연 Apr 06. 2022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아

갈라치기, 호불호, 이제 그만 좀 싸우고 '취존'합시다

한국 사람들은 편 가르는 걸 정말 좋아한다.

별별 기준을 다 가져다가 편을 가르고, 내가 속한 편끼리 공유하는 무언가에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그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다른 편을 욕하고 배척한다.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렇게 실제로 깔끔히 둘로 구분되지도 않는 두 속성으로 흑백논리처럼 나누어 보는 것은 이미 역사가 오래된 이야기다. 이제는 그 편 가르기가 취향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음식 취향.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만큼 식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몇이나 될까? 한국 사람들은 정말 음식에 진심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맛’에 진심이다. 아무리 의식주 중 ‘식’이 제일 중요하다지만, 의나 주 관련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사회 풍조나 유행에 반발 없이 따라가곤 한다면 식만큼은 얼마나 소신이 확고한지 모른다. 그래서 호불호라는 이름으로 입맛도 더 잘개, 잘개 나누어 편을 가르곤 한다.

 

근 몇 년간 인터넷을 휩쓸었고 아직도 그 열기가 지속되고 있는 민초 논쟁을 생각해보라. ‘민트초코는 치약이다’ 라는 반민초파의 주장에 민초파가 격렬하게 반박하면서 논쟁에 불이 붙었고, 논쟁에 중립은 없었으며, 서로는 서로를 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논쟁의 본질보다는 ‘민초’라는 키워드 자체가 이슈가 되면서, 한국인의 유행 따라가기 특성을 십분 활용한 대기업은 온갖 것에 민초를 가져다 붙이며 뇌절을 시작했다.

 

비교적 역사가 깊은 탕수육 부먹 찍먹 논쟁은 그 유구한 역사 탓에 신선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쳐먹’으로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였다면, 민초와 반민초 논쟁은 이러한 대통합이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상처뿐인 논쟁이라고 봐야 하겠다.

 

우선 나는 민초파다. 하지만 원래부터 민초파는 아니었다. 민초 논쟁이 수면 위로 오르기도 전인, 초등학생 때 예쁜 색깔에 이끌려 민초를 처음 맛봤다. 분명 맛있으리라 확신했지만, 한 입 먹고 ‘이게 대체 무슨 맛이지?’ 싶었다.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맛이었다. 다행히도 내 친구들 중에서는 민초파가 꽤나 있어서 그 뒤로 당장 민초를 멀리하지 않고 한번, 두번 더 먹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줏대없음에 감사하고 있다. 딱 세 번째 민트초코를 먹을 때 ‘아, 이 맛에 먹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들 한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별로였는데 먹다 보니 참맛을 알게된 경우. 이와 동시에 음식이든, 다른 것이든. 동시에 첫인상이 별로면 왠지 꺼리게 된다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면 잘하는 집에서 제대로 먹어야 한다고들 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만큼 첫인상이 별로였어도 기회를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민초파에서 민초파가 된 것에서 얻은 교훈이다.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입맛이 있듯이, 음식이라는 것이 원래 나한텐 아무리 맛있어도 남한텐 별로일 수도 있고, 나는 줘도 안 먹는 음식을 어떤 사람은 없어서 못먹는 경우도 많다. 나와 입맛이 다른 사람은 다른 신체 구조를 가진 외계인도 물론 아니다. 다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좋아하겠지. 우리는 서로 다른 맛을 좋아할 수도 있고, 같은 음식의 서로 다른 포인트를 좋아할 수도 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취향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별 이견 없이 맛있다고 느끼는 맛도 있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맛도 있다. 흔히 ‘마이너’라고 불리는 취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수가 ‘불호’를 외치는 마이너한 맛은 정말로 맛이 없는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단지 그 맛에 공감하는 사람이 소수일 뿐이다. 그렇기에 남들은 모르는 그 참맛을 알고 바로 그 맛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맛일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취향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취향이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탕수육은 바삭한 식감이 살아 있는 찍먹이 좋지만, 소스에 잔뜩 불어 부들부들해진 튀김옷과 소스 속 야채가 어우러지는 부먹도 나름대로 맛있다.

복숭아는 향긋하고 은은한 맛이 사각사각 씹히는 딱복이 좋지만, 밀려오는 달콤함에 손과 입이 온통 끈적이는 것도 감수할만한 물복도 나름대로 맛있다.

고구마는 입안 가득 차는 밀도 있는 식감에 우유와 함께 먹는 밤고구마가 좋지만 야들야들 촉촉한 속살이 황홀한 호박고구마도 나름대로 맛있다.

 

다른 사람은 과일이 따뜻한 게 싫다고들 하지만 나는 파인애플이 들어간 피자도 맛있고, 다들 뼈 있는 치킨을 시키면 닭다리부터 집지만 나는 한입 베어물면 살코기가 꽉 차있는 뻑뻑살에 손이 간다. 그것도 나름대로 맛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나름대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저마다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고, 그걸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을 더 넓고 다채롭게 느낄 수 있다. 음식도 그렇고, 다른 것도 그렇다. 그러니 이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과 파인애플 피자를 먹으면서 눈치 보지도, 눈치 주지도 말자. 그것도 다 나름대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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