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하연 Nov 14. 2023

모든 떨어진 글들을 위하여

떨어진 내 글들에 대한 헌정. 그러나 이 글마저도 떨어진, 

언젠가부터 글이 무겁게 느껴졌다. 물성을 가진 것도 아닌데, 화면에 표시된 명암에 불과한 자음과 모음들이 손을 잡고 군락을 이뤄 덮쳐 오는 듯했다. 종이에 찍힌 글들은 말할 것도 없다. 분명 두께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던 한 장, 한 장이 어느새 나이테처럼 쌓여 육중한 무게감을 자랑한다. 빽빽하게 쌓인 글자들이 긴 문단을 이뤄 나를 압도해 온다. 마치 내 옹졸한 집중력을 시험하듯이. 나는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린다. 아니, 보통은 지레 겁을 먹고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거나 책을 휘리릭 넘겨 덮어버리곤 했다. 시간 안에 읽고 분석해내야 하는 긴 지문들, 내 감상보다는 잘 정리된 작가의 의도나 형식이 더 중요한 문학 작품들, 쓸데없이 긴 분량을 채워 써내야 하는 글들... 점수나 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언젠가는 진정으로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는 때에 오히려 더 글이 무겁고 버겁다.      


어쩌면 아직도 활자와 친해지지 못한 이유는 내가 읽는 글이 이전보다 무겁고 딱딱해져서일지도 모른다. 한평생 잘 가공된 문장, 소화시키기 편한 수준과 내용의 글들만 골라 읽다가 맞닥뜨린, 딱딱하고 차갑게 정제되어 있거나 혹은 아주 날것의 속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글들. 그것들을 씹어 삼키기 힘들고 소화시킬 자신은 더더욱 없어서 피하고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계속 짧고 말랑말랑한 글들만 골라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잘 익은 부드러운 음식에 익숙해져 퇴화해버린 인류의 송곳니처럼,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글을 멀리한다는 것은 또한 한없이 얄팍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 휙 날아가 밑천이 까발려질지 모르는 얄팍한 지성, 그걸로 어떻게든 탄로 나지 않게 잘 버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시청각 자극과 도파민 분비에만 익숙해진 뇌가 이제 140자 이상도 소화시키기 힘들어할 만큼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다시 활자의 세계로 돌아왔다.      


내가 이렇게 글을 무거워하고 무서워하면서도 꾸역꾸역 읽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자연히 누구든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게 되지만, 나는 내 필요에 의한 글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글을 쓰고 싶었다. 읽는 이에게 재미와 감동과 지식과 통찰을 주는 그런 글 말이다. 가끔 그런 글들을 만나면 꼭 사진으로든 메모로든 남겨 놓는 이유는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싶어서이다. 때로 글을 쓴다는 것은 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이 광활한 세상에서,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음에 대한 투쟁과도 같은 일인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걸 알지만 굳이굳이 바닷가에 쪼그려 앉아 젖은 흙에 이름 석 자를 적어보는 것처럼. 그래서 글과 글자의 보급 이래 그렇게 많은 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던 것이 아닐까?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했노라고, 그렇게 외치면서, 증명하면서 말이다. 그런 종류의 글 또한 다른 고뇌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곤 하니 나를 돕는 동시에 남을 돕는 글인 셈이다.     


다행히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정말 많다. 나는 그들이 먹기 좋게 써놓은 글을 깔짝깔짝 받아먹으면서도 배부른 척 엄살을 부려보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문장을 부러워하고 흠모하곤 한다. 하지만 남이 쓴 글조차 이리저리 간보고, 조금이라도 길고 무거워 보인다 싶으면 얍삽하게 발을 빼는 내가, 제 손으로 쓴 글이 무게감 있기를 바라는 것도 웃긴 노릇이다. 내 글은 늘 그렇게 자조와 시기와 얄팍한 지성 속에서 누덕누덕 기운 듯 짜집어져 나왔고, 보통은 줄곧 읽어주는 사람 없이 방치되곤 했다.      


읽히지 않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읽히지 않는 글은 마치 표현되지 않는 마음과도 같다. 내가 백날 천날 써봤자 세상이 들여다봐주지 않으면, 내 투쟁 또한 가청 주파수 너머 어딘가에서 배회하는 작은 떨림처럼 지각되지 못한 채 스러질 것을. 그리 생각한다면 참 나약한 투쟁이 아닐까 싶다. 현재에든, 미래에든, 타인에게 읽혀야지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투쟁이라니. 물론 빼어난 글들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활자화된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바로 독자가 아닐까? 결국 나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글조차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읽어줬기에 그러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가 외에는 읽어줄 사람이 없는 내 글들을 나라도 여러 번 들여다본다. 써놓고도 종종 읽어보며 고치고, 묵혀두다가도 가끔 먼지를 털어내고 들여다본다. 그러다 가끔 용기가 생기면 이것들을 세상에 내어놓기로 결심한다. 자주 들여다본 글은 그새 정이라도 붙은 건지, 얄팍하고 이리저리 기운 글이지만 내 눈에만은 퍽 사랑스러웠다. 내가 흠모하곤 했던, 흠잡을 데 없이 맘에 꼭 차는 그런 글은 아니더라도 어서 훨훨 날길 바랬던 글들이었다. 그래서 글을 올리기도 했고, 보내기도 했다. 숱한 글쓰기 대회, 에세이, 시, 서평 공모전, 표어 공모부터 작사 공모전... 많은 글들이 내 손을 떠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은 응모한 사실조차 까먹을 정도로. 지금 생각해보니 개중에 내가 글로 받은 상은 부끄럽게도 고등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은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그래도 어릴 때는 마음만 먹으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글이 술술 잘 나왔는데, 어째 갈수록 그게 어렵다. 써내는 것도, 잘 쓰는 것도, 인정받는 것도. 마음이 가난해져서 글도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닳고 닳아 낡아빠진 글이라 남이 봐도 매력이 없는 것일까, 내 글을 좀 읽어보시고 뽑아주십사 여기저기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연락에 익숙해지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 글은 무겁고 버겁고 어렵기까지 하다.      


급기야는 글을 쓰는 사람들 몇몇과 함께 직접 문집을 만드는 일을 자처했다. 아무도 출간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싣겠다는 오기로. 잠시나마 생전 처음 해보는 편집장 노릇을 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공평하게 다 실을 수 있어서 기뻤다. 검열되지도 평가받지도 않은 글들, 누군가의 핸드폰 메모장이나 SNS , 블로그 속 한구석에 머물렀을 뻔한 글들이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나 물성을 얻고, 두께를 지니고, 그렇게 두툼한 문집 한 권이 완성되어 제각각 책장 한 켠을 차지하면, 한 번이라도 더 읽히고 기억되겠지 싶어서 뿌듯했다. 문집을 펴낸 일련의 과정들은 나의 모든 떨어진 글들에게 바치는 헌정과도 같은 일이었다.       


떠올리면 속이 쓰려 나조차도 묻어두고 잊으려 했던 내 떨어진 글들. 그 글감들은 나보다 넓고 깊은 사람 손에서 빚어졌으면 훨씬 유려한 글이 되어 여기저기서 찬사받고 있었을까? 적어도 한 번 더 읽히긴 했을까? 남을 평가하는데 숙달된 실력자들은 글 첫 문단만 읽어도 나머지 수준을 알 수 있다던데,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지원자가 첫 소절을 부를 때 이미 실력이며 합불 여부까지 다 결정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내 글은 얼마나 읽혔을까, 첫 문단, 아니 첫 문장을 다 읽히지도 못하고 휘릭 넘겨져 그대로 파쇄기에 들어간 건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글에서 드러나는 나의 얄팍한 마음을 이미 꿰뚫어 봤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글들에 대한 방향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떠돌아 갈피를 잡지 못한다. 평생을 평가받는 사람의 입장으로만 살아와서인지, 가차 없이 떨어진 내 글처럼 세상의 잣대에 나와 내 글들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움을 뒤로하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남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대답해 주는 사람 없는 의문을 가득 안고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내 안에 수두룩한 그 떨어진 글들을 가만히 접어 본다.      


기껏해야 한두장에 불과한 분량의 글들, 얇은 종이 몇 장으로는 그 무엇도 지탱하지 못한다. 떨어진 글들을 그러모아 앞으로, 뒤로, 계속 뒤집어가며 접어본다. 너는 무엇이 부족했니, 나는 무엇이 부족했니,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글들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가 된다. 나는 아직도 글이 무겁고 버겁고 어렵다. 내 글들은 여전히 얄팍하고 두꺼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읽어주지 않는 건조한 글이나마 묵묵히 접어본다. 접히지 않은 종이는 그저 평면이지만 종이를 잘 접으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입체가 되는 것처럼, 내 접힌 글들도 널브러져 있기보단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내 투쟁의 쓰라린 흔적 같기도 치부 같기도 한 그 글들이 스스로를 지탱하고 나를 지탱하여, 더이상 활자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당당히 항해할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춤추는 갈대가 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