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생각하는 갈대' 라고들 한다. 과거 그 어느 때 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갈대이다. 우리의 인생과 고통, 그리고 불안을 떼어내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불안은 삶을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그러나 썩 달갑지는 않은 존재이다. 철학자이자 우리나라에서 이미 잘 알려진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은 <불안> 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물질적 풍요와는 상반되는, 그 어느 때 보다 늘어난 만성적 불안을 '지위'로 인한 불안으로 보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논의들을 관통하는 주제를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망과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으나,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그렇다면 지위란 무엇인가? 지위란 사전적 의미에서,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를 뜻하며, 그 어원은 '신분'이라는 뜻의 라틴어이고, '신분'은 다시 '서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뚜렷한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으며, 혹은 그것에 대한 정보가 없는 데에서 답답함과 고통이 가중되곤 한다. 원인 모를 증상으로 고통받던 환자가 의사의 정확한 병명 진단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 것 처럼, 우리도 이 애매모호한 '불안'이라는 증상이 일정 부분 '지위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진단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이 질환이 발병하여 끈질기게도 낫지 않는 이유를 분석하고, 적절한 치료법을 탐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 삶의 조건의 개선이라는 이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우리 모두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제아무리 잘난 가수와 연예인이 'LOVE YOURSELF', 즉, '자기애'를 노래해도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타인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을 담고자 준비된 그릇이 있다는 걸. 첫번째 그릇, '타인의 사랑'을 채우는 것 만큼이나 '세상이 주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생각보다 중요하고, 복잡하고, 보편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두 그릇을 채우는 것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왜냐하면 그릇의 채워진 정도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불안의 첫 번째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의존성은 불안의 다른 이유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데, 저자가 제시한 두 번째 불안의 이유가 '속물근성'이다. 속물근성은 좀더 집단적으로 지속되는, '지위의 상징에 대한 갈망'으로 볼 수 있다. 높은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좋은 차, 좋은 집, 명품 옷, 수천 수만의 팔로워 수 등등을 갈망하는 것 말이다. 이 역시 세상이 주는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현된다. 이밖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의 실체는 사회적, 역사적 흐름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책의 첫 파트에서 이를 하나하나 짚어보고 있다. 서양 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 평등 의식의 전파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소용돌이...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우리는 조상들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많은 것을 '기대'한다. 신자유주의 열풍에 따른 능력주의의 도래가 쐐기를 박는다. 이제는 낮은 지위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당연한 것이 아닌, 나의 무능력을 상징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높은 지위에 대한 갈망에 기름을 붓는다.
책을 읽다보면 질병의 원인에 대해 유전적, 환경적 요소부터 낱낱이 분석하여 설명하는 과학자를 보는 것처럼 저자의 분석에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이 책은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에 대한 책을 읽으려고 집어든 독자가 원하는 바는 필시 '왜 불안한지 정확히 아는 것' 보다는, '불안을 해결하는 것' 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에서 제시된 불안에 대한 해결책은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5가지이다.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제시된 불안에 대한 근본적, 실질적 해결책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만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게는 불안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술'이 제시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불안에 대한 해결책을 다루는 책의 두번째 파트에서 처음 제시된 이 문장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근본적 불안에 대한 대처법을 담고 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서 평등하고도 하찮은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에 도움을 주는 것이 어쩌면 종교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거대한 자연 그 자체, 혹은 자연의 숭고미나 폐허를 그린 예술작품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근본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삶에 대한 비평'이다.
그렇다. 삶을 음미하려면 삶을 비평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술은 이를 도울 뿐이다. 철학적 염세주의자로 대표되는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불안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 중 한명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남긴 대표적 어록은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이다. 또 그는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얼핏 극단적인 것 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마치 우리에게 남들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 그릇을 안고도 충분히 삶 자체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철학자들, 그리고 저자가 말하듯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있느냐' 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생을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는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노력을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음을 인지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적어도 우리는 끝없는 챗바퀴를 돌리는 설치류와는 다르다. 우리는 불안과 욕망을 이용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보이는 '소유와 성취'를 위해 달려갈 수 있다. 그리고 소유와 성취는 - 비록 그것을 달성하기 전에 보였던 것 만큼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우리에게 쾌락과 행복을 선물한다. 우리는 어쩌면 좀 더 튼튼하고, 오래 가는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걸지도 모른다. 비록 모든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영원히 지속 가능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지위를 갈망하는 것은, '지위'라는 단어의 어원처럼,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서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작고, 죽음 혹은 거대한 자연의 순리 앞에 나약하고, 잠깐을 살다 스러지더라도 말이다. 내가 서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처럼 굳건하게 서서 세상의 바람을 맞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쉼 없이 흔들리는 갈대로 비유했던 파스칼의 말처럼, 안타깝게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무가 아니라 갈대다. 이것이 어쩌면 모든 비극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해하고, 생각하고, 노력함으로써 적어도 우리는 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즐겁게 춤을 추는 갈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선조들의 오랜 시도와 고뇌에서 보았듯, 우리는 바람을 견디고 꼿꼿하게 서 있을 수는 없다. 홀로 서서 바람에 저항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어차피 갈대로 태어나서 살아갈 운명이라면, 춤을 추는 갈대가 되자. 어쩌면 저자가 <불안>이라는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도 그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