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져야 바로 서는 병풍처럼

by 월하연

고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하던 래퍼의 믹스테잎 제목이 ‘병풍’이었다. 왜 병풍이냐 물었더니 병풍은 굽어져야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제목이 완성하는 글이 있는 것처럼, 그 믹스테잎 또한 실로 제목으로써 완전해진다고 감탄하며 수록된 11곡을 주구장창 들었었다. 그 곡들은 가사를 쓴 래퍼 본인이 굽어지고 접히고 꺾인 흔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벌써 7년이 지난, 18살의 그 때가 나에게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꺾였던 시기여서 한 곡, 한 곡이 더 심장에 쿡쿡 박힌 것처럼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한번 접힌 종이는 절대로 접히기 전의 새 종이와 같아질 수 없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나는 하얀 도화지에서 시작해 아주 꼬깃꼬깃 접었다 편 종이 같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접힌 자국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패배감, 열등감, 질투와 자격지심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한 번도 접혀 보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티 없이 맑은 사람이 부러웠다.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인생에서 자기혐오라고는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사람. 굴곡이라던가 실패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렇게 올곧게만 자라 깨끗한 도화지 위에 진짜 내 인생을 그려나가고 싶었다. 지금 내 꼬깃한 종이 위에는 뭘 그려도 삐뚤빼뚤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


유난히 마음이 뒤틀리고 속이 꼬인 듯 답답한 날, 십 대 이후로 자주 듣지 않았던 믹스테잎을 오랜만에 다시 들었다. 그 당시에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노래를 듣는 나는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평생 우울한 곡만 쓸 줄 알았던 청소년 래퍼는 성인이 되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고, 영원할 것 같던 우정이 산산조각 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가장 소중해지기도 한다. 평생 교복 입고 시험 공부만 할 것 같았던 나도 성인이 되어 평생 관심 없을 것 같던 분야를 부전공까지 하고 있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상처 하나 없이 반듯할 줄만 알았던 나는 그토록 접히고 꺾이며 무엇이 되었는가? 그때 굽어져야 비로소 설 수 있다는 병풍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가 되기 위해, 바로 서기 위해 그토록 아팠던 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제 나는 병풍처럼 내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서 있다. 바람 한 번에 쉽게 날라가는 평면의 종이보다는 더 단단해진 셈이다. 때로는 비가 내리고 물에 흠뻑 젖어 금방 찢어질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해가 뜨면 굳는 땅처럼 나는 더 빳빳하고 단단해진다. 그렇게 세월이 꺾고 지나간 흔적이 남은 내 종이가 나는 이제서야 제법 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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