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집을 차릴 때, 로망이 있었다. 지리산 물로 보리차를 끓여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손님에게 물 한 잔 대접하고 싶었다. 길 위에서는 물 한 잔도 오아시스일 수 있기에...
한가하던 점심, 한 여자가 들어왔다. 비빔국수를 주문하고 그냥 멀뚱히 앉아 있길래, 물은 냉장고에 있으니 가져다 드시라고 말했다. 그녀는 보리차를 가져와 홀짝이며 마셨다. "비빔국수 나왔습니다." "저, 김밥이 큰가요? 김밥도 먹고 싶은데..." 나는 조리대에 서서 김밥을 말고, 그녀는 바에 앉아서 비빔국수를 먹으며 서로 마주 본 채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흔한 질문, 혼자 여행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갈 계획이냐... 길 위에서 수 천 번 들었던 질문을 지금은 내가 여행자에게 하고 있다.
그녀는 벽에 걸린 내 여행 사진을 보더니 포르투갈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리스본과 포르투 두 대도시만 여행했지만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포르투까지 순례자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두 도시 중엔 포르투가 더 좋았다고 했다. 작고 낭만적인 도시 포르투. 와인통을 실은 작은 배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정취, 파두 공연을 보고, 트램을 타고, 골목길을 산책하고.... 나 혼자 추억으로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있을 때, 문득 그 사이를 비집고 그녀가 말했다. 포르투갈로 이민 가고 싶다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그녀에게 물었다. 포르투갈에 다녀왔느냐고. 그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왜 포르투갈로 이민 가고 싶냐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그냥 한국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게 싫고 각박한 생활이 좀 싫다고 말했다. 나는 잠깐 생각하는 척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포르투갈은 특별히 좋지도, 특별히 나쁘지도 않았다. 그냥 나와 교차한 시공간이기에 그리워할 뿐... 아직 가보지 않았다면 먼저 여행으로 포르투갈을 가보고, 또 포르투갈뿐 아니라 가능한 많은 나라들을 여행해 보고, 거기서 자기에게 끌리는 나라가 어디인지 직접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녀가 이민을 생각하게 된 진짜 배경이 궁금했다. 또 왜 하필 포르투갈을 떠올렸는지, 왜 여, 기, 서 떠나고 싶은지... 하지만 너무 깊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건 시간이 필요한 질문이고, 어쩌면 잠깐 만난 그녀에게 나는 그렇게 깊이 들어갈 수 없는 건지도....
묻지 못한 말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두런두런 여행 얘기도 나누고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몇 마디 더 나눴다. 그리고 그녀가 마을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가야 한다며 일어서더니 말했다. "저 사실은 물을 안 마셔요. 하루 종일 한 잔도 안 마실 때도 많아요. 집에 정수기가 있는데 그 물도 잘 안 마셔요. 어제 숙소에 마련돼 있던 물도 혹시 몰라 가지고 나왔을 뿐 안 마실 확률이 높아요. 근데 저 여기서 물 4잔 마셨어요. 물이 진짜 진짜 맛있어요." 나는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식탁에 올려둔 생수병을 달라고 해 그 안의 물을 비우고 보리차를 가득 채워주었다.
그녀는 정말 이민을 가게 될까? 그것도 포르투갈로? 어쩌면 길 위를 떠돌다, 어디에 사는지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까? 사실 자기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한 문제는 어디나 있고, 고민과 방황은 계속된다는 걸 알게 될까? 아니면 진짜 그녀만의 진실을 찾고, 살고 싶은 나라를 찾게 될까?
그녀가 떠났다. 나는 보리차 한 잔을 떠놓고 옛날 엄마들이 장독대 위에 물 떠 놓고 기도하듯, 그녀의 평안을 위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