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소설가의 <안으로의 여행>. 인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난 후 읽게 된 소설이다. 그 속에 꽃의 계곡이란 곳이 나온다. 인도 북부 강고트리 근처에 있는 계곡인데 천지사방이 꽃들인 그곳을 걷고 나면 가졌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묘사돼 있다. 물론 소설 속 장치라는 걸 알았지만... 그날부터 나는 그곳을 꿈꾸게 되었다. 모든 기억, 아니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자살로 죽이지는 않고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나'를 잊어버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두 번째 인도 여행. 북부 쪽을 참 많이 돌아다녔다. 내니딸, 알모라, 코싸니, 달하우지, 짬바, 커지야르, 레꽁빼오, 껄파, 쌍라... 여행객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었고 정말 아름다운 곳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찟꿀이라는 동네를 가려고 산 중간마을에서 갈아 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 둘이 호객 행위를 하며 하루 두 대 있는 버스 중 오전 버스는 갔고 오후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니 지프차를 타라고 했다. 못 들은 척 한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리다 결국 지프에 올랐다. 그런데 금액을 협상한 후 차에 올랐는데도 그들은 30여분 동안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편도로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길이니 한 사람으론 기름값도 안 나와서 그랬을 테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나는 슬슬 짜증을 냈다. 출발할 거냐 말 거냐 내리겠다...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창 밖으로 고개를 빼 자꾸 뒤를 돌아보며 액셀을 밟는 운전사. 안 되겠다 싶어 뒷자리 가운데에 앉아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힌디어, 영어 섞어가며 말도 안 되는 수다를 시작하자 운전석에 앉은 친구는 백미러로 쳐다보며 웃고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몸을 아예 내 쪽으로 돌려 내 얘기마다 배꼽을 잡았다. 이렇게 웃긴 여자는 처음 본다고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손님 받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주변 마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예쁜 마을에선 차를 멈춰주었고 감탄하며 소리 지르는 나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들은 결혼해야 하는데 돈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 산골에 사는 어려움, 간직하고 있는 꿈 이야기... 등을 풀어놓더니 급기야 나에게 '시스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도록 달려 도착한 마을에선 갑자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시스터'에겐 돈을 받는 게 아니라며 돈을 쥐어주면 화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잠깐만 기다리라 해 놓고 마을 초입 구멍가게에 가 담배 두 갑을 샀다. 그들이 진심으로 대해주었듯, 나도 마음을 주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하자 그들은 담배를 받아 쥐었다. 그들이 담배 한 대씩을 태우는 동안 난 또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참 셋이 배를 잡고 낄낄거리다... 맑은 눈동자에 반짝이는 물기를 보이며 그들은 떠나갔다.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그 대기의 따뜻함. 박제된 오후.
마을에서 유일한 숙소는 나무만 대충 얽어 놓아 밤에 엄청 춥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볕을 열심히 쪼여두자 싶어 가방만 던져놓고 밖으로 나갔다. 지프차 사내들이 이곳은 중국과 인도 경계라고 하더니 설산이 아주 가까웠다. 설산 쪽을 향해 걷는 동안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노랗고 빨갛고 파랗고 보라에 분홍인 꽃들... 눈 덮인 산과 맑은 계곡과 수많은 꽃들... 만약 꽃의 계곡이란 곳이 실재한다면 이런 모습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잊어버리고 싶던 '나'와 함께 인도를 몇 달 동안 헤매고 다니다 만난 '꽃의 계곡'. 아무도 없는 그 계곡에서 꽃바닥을 뒹굴고 웃다가 울다가 소곤대다가 소리 지르다가 기도를 하다가.... 미친 여자처럼 여러 감정을 쏟아냈다. 물론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꽃의 천국을 마음껏 누리자 마음속 응어리 같은 게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오아시스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긍정과 희망이 우릴 구원한다는 사람을 보면 코웃음 쳤다. 모두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며 '마음'을 보라고 하면 도덕관념에 빠진 얼간이라고 욕했다. 세상엔 비열한 일도, 어둡고 비정한 일도 많고, 블랙코미디 같은 게 세상이라고. 갈증에 허덕이다 모래에 코를 박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고... 비관과 부정의 세상에서 오아시스는 신기루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길 위를 떠돌게 됐고... 길 위에서 살갗으로 만지고 코끝으로 냄새 맡고 눈으로 보고 나서야... 부정의 세계야 말로 내 '생각'이 만들어 낸 신기루라는 걸 알았다. 내 결핍과 인정욕과 망상이 만들어 낸 가짜 세계라는 걸 알았다. 죽이고 싶던 '나'라는 것조차 내 생각과 에고가 만들어낸 가짜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됐다. 꽃의 계곡은 소설 속 장치가 아니라 실재하는 곳이었다.
다음날, 밤새 추위에 떨다 아침 일찍 2층 난간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수만 장의 벚꽃 잎이 휘날렸다. '어? 여기에 벚꽃나무가 있었던가? 꽃잎이 왜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지?' 멍청히 생각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건 벚꽃 잎이 아니라 나비였다. 흰나비들이 휘몰려 올라가고 있었다. 수만 마리 나비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던 순간, 나는 다른 세계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입구에서 나는 많은 기억을 잊어버렸다.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가학적이었던 많은 기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