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선물

by 문경화

인도와 네팔을 일 년째 여행 중일 때 언니에게서 메일이 왔다. 엄마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할 예정이니 들어와 간호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하필 나야?' '지금 한창 인생수업 중인데, 왜?' 그러나... 결혼을 안 했고 놀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하다 여행으로 도망가버린 이상한 사람도 나였다.


엄마는 인공관절 수술 몇 달 후 위암이 발견되었다.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말기. 그럼에도 온갖 병원을 돌아다녔다. 짐을 싸고... 짐을 풀고, 엄마를 씻기고, 먹자마자 토하는 엄마와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고, 내장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로 호흡하고, 새벽에도 몇 번씩 화장실에 가는 엄마를 부축하느라 깊은 잠을 못 자고, 엄마의 병세에 눈치 주는 병실 사람들과 싸우고...


그러나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내게서 뿜어 나오는 '화'였다. 인도에서 비파사나 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고, 꽃을 들고 걷고, 세계 각국의 친구들과 진리와 평화에 대해 얘기 나누고, 맨발로 산책하고, 채식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의 책을 읽고, 음악과 춤으로 거의 완벽하게 채웠음에도... 미칠듯한 분노가 거기 있었다. 자기 몸을 병원과 자식에게만 의지하는 엄마에게, 나에게 간호를 맡겨놓고 일상을 사는 형제들에게, 엄마가 아프도록 원인 제공한 아버지에게, 인내심과 사랑이 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화가 많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사실은... 내면이 바뀌거나 채워진 게 아니라 여행하는 백수의 삶이 평화롭고 즐거웠던 거였다. 변했다고 착각했던 거였다. 조용한 절간에서 깨달은 척 연기하다 아비규환 같은 시장통에 갖다 놓으니 본색이 드러난 거였다. 놀이는 끝나고 진짜 공부 시작이었다.


왜 긴 병에 효자 없고 장사 없다고 하는지 절절히 이해하는 날들이었다. 혼자 펑펑 울 공간도 없었다. 게다가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이었다. 나의 육신을 낳아줬지만 한 번도 궁금해본 적 없는 사람. 그런데 24시간 가까이서 지켜보니, 엄마는 뿌리 깊게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면을 찾아냈다. 물론 병 때문에 아프고 불안하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됐을 테지만 엄마는 늘 남을 부러워했다. 창 밖을 보면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했고, 병실 안에서는 나보다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했다. 무릎이 쉽게 접히는 사람, 퇴원할 수 있는 사람, 장독대 뚜껑을 덮을 수 있는 사람,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사람, 창문 가까이 있는 사람... 뭐든 남들이 가진 걸 크게 봤고 결론은 '내가 못나서'였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 좋은 말로 다독여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놓고... 연휴라 시간이 된다는 언니에게 병원을 맡기고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 쉬고 싶었다. 혼자가 간절했다. 그런데 엄마가 붙잡았다. 내가 없으면 힘이 없고 불안하다며 애원의 눈빛으로 붙잡는데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그때... 문득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무시하고 싶었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간 다음 날, 엄마가 혼수상태라고 연락이 왔다.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엄마는 만 하루를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 나를 찾았다. 나는 침대를 세우고 뒤에서 안아 엄마를 앉아있게 해 드렸다. 엄마는 자신이 낳아 늘어난 식구들을 다 휘둘러봤다.


멍한 눈으로 식구들을 둘러보던 엄마가 다시 침대에 눕고... 전부 저녁밥 먹으러 내려갈 때였다. 어쩌다 나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엄마가 주먹으로 허공을 마구 휘두르는 게 보였다. 혼수상태였던 사람이 무슨 힘이었는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엄마.. 그렇게 원망돼? 원통해?" 엄마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기계 하나 못 다루는 남편 따라 몸으로 농사짓고, 아홉 자식과 일곱 시누이 뒷바라지하고, 자신보다 건강하지만 바깥일 안 하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욕과 술주정으로 힘든 삶을 버텨낸 남편의 한을 온몸으로 받아주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녀였고 아이였고 여자였던 엄마가 안쓰러워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엄마, 괜찮아, 엄마 예뻐, 엄마가 있어 우리가 있는 거잖아. 장하네, 우리 엄마..." 엄마 머리카락을 쓸며 엄마 귀에 속삭였다. 더 이상 허공을 가를 힘이 없는 건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건지 엄마가 팔을 내렸다. 엄마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스무 명이 넘는 가족 모두 식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자 엄마는 다시 혼수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먹은 항생제 약을 거품으로 게워냈다. 아버지는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거품을 닦아드렸다. 그렇게 엄마는 숨을 놓으셨다.


엄마의 몸을 염할 때, 언니들은 이제 고아가 됐다며 엉엉 울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시끄럽게 우는 게 오히려 영혼의 평화를 깰 것 같았다. 왜 우리는 죽음이 축제이자 기쁨이 될 수 없단 말인가? 더러운 것도 무서운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일인데... 한 영혼이 평화의 숲으로 이사 가는 날, 다 함께 축제의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멋질까? '엄마, 아픈 몸에서 놓여나 마음껏 뛰어다니세요.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때는 엄마가 최대한 긍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발랄한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소녀가 되세요. 그리고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엄마는 고향 집 텃밭에 묻히셨다. 그로부터 육 개월 후 나는 스페인의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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