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 건배하는 할머니

by 문경화

한 할머니가 가게 앞에서 메뉴 설명을 한참 들여다보고 서 있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약간 놀라서 인사도 하지 않고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더니 맥주 한 병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맥주를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공중에 "치얼스" 하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목을 축이고 나서야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말씀을 시작하셨다.


서울에 살지만 근처에 별장이 있어 자주 온다는 이야기, 시골 100원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 다닌다는 이야기, 남편과 개가 사는 서울은 개가 보고 싶을 때만 간다는 이야기, 남편은 아직 현직 교수라는 이야기, 자신이 잘 나가는 여행사 사장이었다는 이야기, 52개국을 다녔지만 지금은 비행기 타기 싫어 국내만 돌아다니며 제주도도 배로 간다는 이야기, 자식 농사 잘 지어 아들을 고려대 박사까지 만들었다는 이야기....


귀엽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할머니는 68세라고 하셨다. 여행사 사장일 때 전화기에 수 천 명의 연락처가 저장돼 있었지만 이제는 다 정리하고 전화기도 꺼놓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한참 본인 이야기를 하다, "근데 안주는 왜 안 줘?"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안 시키셨는데요! 맥주만 드시는 줄 알았어요."라고 답했다. 할머니는 "아차차..." 하며 감자전을 달라고 하셨다. "그럼 맥주 한 병 더 마시지 뭐" 하며.


감자전과 시원한 맥주를 갖다 드리자 다시 공중에 "치얼스!". 맥주를 병째 마시는 68세 할머니라니.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챙 넓은 모자, 반짝이는 귀걸이와 팔찌, 비싸 보이는 선글라스, 화려한 색의 옷과 망사팔토시를 끼고 공중에 건배하는 할머니라니. 아... 너무너무 귀엽잖아! 나는 완전 반했다. 방이나 마을 회관에서 사람들과 수다 떨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 보내지 않고... 길 위에 혼자 서 있는 할머니라니. '아, 나도 저렇게 길 위에 혼자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 안 아프고 계속 돌아다니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할머니는 "긍정하는 마음!"이라고 단칼에 말하셨다. "마음대로 된다는 거 자기도 알지? 사실은 이빨이 안 좋은데 치과 가기 싫어. 그게 젤 안 좋고 나머지는 괜찮아." 할머니는 맥주 두 병과 감자전을 먹고 가게를 나섰다. 술 깨기 위해 산책하고 가야겠다며 "또 올 지도 몰라" 하며 문을 닫으셨다.


사업을 크게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많은 나라를 다녀봤기 때문에 오는 어떤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어차피 우리 대부분은 자기 우물 안에 살지만 그 우물이 꽤 넓어진 느낌, 경험에서 오는 긍정에 대한 예찬, 자랑은 하되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애면글면하지 않는 푸르름. 할머니, 아니 그녀는... 여전히 청춘을 지나는 중이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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