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화가 변월용
국적: 소련
출생:1916년 9월 29일
러시아 제국 연해주 시코토프스키구
사망: 1990년 5월 25일 (향년 73세)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스베르들로프스크 미술학교 레핀 미술대학 (수석 졸업)
화가, 평양예술대학 학장, 레핀 미술대학 교수
1916년 연해주 쉬코토프스키 구역의 유랑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호랑이 사냥꾼인 할아버지는 어린 그에
게 늘 "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쫓아 연해주를 유랑했지만, 너만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라!"라고 생전에 강조했으며 손자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병진년 용띠 해 달밤에 태어났다고 월룡이라 지었다.
'유랑'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유랑촌은 할아버지가 호랑이를 쫓아 떠돌다 머문 것처럼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렇게 유랑을 떠돌다 한 명 한 명 정착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변월룡은 이처럼 깡촌 중의 깡촌에서 자랐지만, 러시아 최고 최대의 미술대학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 회화. 조각. 건축 계술대학'(이하 레핀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고는 대학교 교수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린 그는 교과서의 삽화를 그려낼 정도로 미술에 소질이 있었으며 한인학교를 다니던 중 주변인과 가족의 도움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하지만 그가 유학을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는데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변월룡 자신은 유학을 떠난 덕에 강제 이주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족과 친척은 예외 없이 소련 타슈켄트로 이주당하게 되었다.
변월룡은 평생 자신의 월룡이란 이름을 고수하며 한국인으로 살려고 노력했으나, 고국에서의 삶은 고작 1년 3개월에 그치고 말았다.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취임했지만, 북한 당국의 무리한 귀화 종용을 따르지 않은 죄로 결국 숙청으로 이어졌다.
그는 소나무에 자신과 조선 민족의 처지를 투영하여 다양한 풍경화를 그렸다. 그의 초상화도 유명한데 인물을 그릴 때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사람의 내면을 잘 파악하여 그 사람의 분위기까지 잘 표현하였으므로 그의 초상화를 '명작'이라 부른다. 붓에 끼여져 나간 자국까
지 선명할 정도로 유화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다.
'설령 선진국에서 좋은 재료는 빌려 올지라도
그림에서 민족혼은 잃지 말아야 한다."
스베르들롭스크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운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26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러시아 최고 미술대학인 국립 레핀 아카데미(레핀미술대학)에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이후 그곳 의 데생과 조교수직을 맡으면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 1953년엔
부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이 시기에 많은 인물화와 풍경화를 남겼다. 그는 특히 소련 당국의 명령으로 다양한 노동자 영웅의 인물화를 그려내었는데 이 영웅 인물화들은 변월룡 자신의 시선과 필체보다는 소련 당국이 요구하는 이념을 반영한 작품이었다
한편 그는 다양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풍경화는 소련에서 꺼려지는 장르였다.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기에 인물화 보다 모호하여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풍경화에서는 근대 공업국가로서의 진취성과 모국의 상징인 광활한 자연, 풍경을 그리도록 요구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풍경화의 이데올로기적 모호함을 이용하여 인물화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성과 시선을
드러내곤 하였다.
이러한 풍경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가가 투영되는 소재는 다름 아닌 소나무다.
그의 풍경화는 주로 러시아의 풍경을 소재로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풍경화에는 러시아에선 자생하지 않는 한반도의 소나무가 홀로 그려지곤 했으며 소나무는 바람에 휘날리거나 비바람을 맞는 등 풍파에 시달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이는 소련 속의 고려인으로 존재해야 했던 변월룡이 느끼던 자신의 처지가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소련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소수민족으로서 변방에 위치한 자신의 입장을 러시아 풍토 위에서 고난을 겪으며 홀로 존재하는 한국의 소나무로 그려낸 것이다.
이후 그는 소련에서의 미술활동을 이어갔으며 60년대엔 소수에게만 허용되던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러 극동지방과 유럽 국가의 모습을 그려냈는데 이는 그가 정치적으로 신뢰받았던 덕이 크다.
1977년엔 레핀 아카데미의 데생과 정교수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그가 태어난 곳이자 북한과 가장 가까운 연해주에서 풍경화를 자주 그렸다.
1985년 레핀 아카데미를 퇴직한 그는 1990년 5월 25일, 레닌 그라드에서 뇌졸중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사후 그의 전시회는 한국에서 몇 차례 추진되었지만 여러 가지 정치 적인 이유로 인하여 무산되곤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그의 아내 제르비조바는 살아생전 남한에서의 전시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제르비조바도 사망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들과 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전시회가 대한민국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의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016년 3월 처음으로 열렸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라는 이름으로 냉전 시대에 살아가야 했던 그의 정체성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아내 프라스코비야 제르비조바(1920-2005)와 자식들(차남 펜 세르게이, 장녀 펜 올가)도 화가로 활동했다.
러시아 미술계 거목으로 활동하면서
'한글 이름'을 평생 고집하고, 모든 작품에 표시하며, 묘
비에도 새기라는 유언을 남긴 그가 국내에 처음 본격 적은 로 알려진 것은 2012년이다.
러시아 유학 중에 그의 작품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미술평론가로 전업한 문영대 전 경남대 미술교육과 겸임교수가 그의 삶과 예술을 깊이 연구해, 그해에 펴낸 책'우리가 잃어버린 천재 화가, 변월룡 덕분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서 표현하고, 6∙25 전쟁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도 그린 그의 작품에는 한국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소련 체제에서 휴전협정 직전에 파견된 북한에서 1년 3개월을 보내며 현대 미술을 이식하고 평양미술대 학장 등으로 활동했지만, 이질 치료를 위해 '잠시'로 예정하고 가족이 있는 소련으로 돌아간 뒤로는 북한도 다시 갈 수 없었다.
북한 영구 추방 전 그는 '햇빛 찬란한 금강
산'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등과 함께,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 소설 '닥터 지바고'를 쓴 소련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근원( 수필'을 쓴 소설가 김용준 등의 초상화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