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제국 : 임근혜
미술의 중심지라는 환상은
이곳저곳을 표류하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를 되돌아보면. 나는 런던이 결국 그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로버트 라우센버그 1997-
시대정신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1945년 이후 영국인의 삶이
서서히 활기를 띠었던 것에도 적용된다.
그 변화는 사실상 어느 정도 의상과 실내 장식의 변화였다.
회색과 갈색이 점차 강렬해져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신적 태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950년대 말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전쟁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삶이 점차 나아지고 기회도 점차 넘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꾸준히 발전하는 영국에서 성장했다.
변화는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일어나지만 갑자기 분명 해지는 순간이 새로운 10년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던 어느 날 그런 순간이 벌어졌다.
1959년 9월 신입생 무리가 왕립예술학교에 도착했다 신입생 중에는 볼데릭 보시어, 로널드 브룩스 키타이, 피터 필립스, 앨런 존스, 호크니가 있었다.
훗날 "1960년대 영국 미술을 지배한 미술가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지도한 교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호크니에 따르면 교수들은 이 유별난 입학생들이
'오랜 경험 중 최악"이 라고 생각했다.
입학 첫날 오후
"존스는 실물을 그리는 회화 작업실에서
야수파를 연구하며"
그가 본 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외관상 그 작품은 그다지 혁명적이라 할 수없었다.
야수파 화가들은 반세기 전 선명하고 비자연주의적인 색채로 파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59년에 야수파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존스와 그의 동시대 동료들에게 세계가 꼭 잿빛은 아니었다.
존스의 1960년 작품 (생각하는 미술가)는 빨간색과 녹색의 이례적인 색채 코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성의 아랫부분에 놓인 자화상은 주로 파란색과 회색의 줄무늬와 소용돌이로 이루어졌다.
존스는 만화로부터 '생각 풍선'을 차용해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암시한다. 그의 머릿속 생각은 색의 그룹뿐 아니라 초록색의 가슴 같은 언덕이 암시하는 성행위로 이루어진 듯 보인다.
앨런 존스, 생각하는 미술가 1960
존스와 몇몇 동시대인 역시 미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열심히 그리고 대단히 자신감에 차서 생각하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생각은 왕립예술학교의 선배 세대들이 했던 생각과는 달랐다. 선배들의 방식은 적어도 일부 학생들의 깊고 야심 찬 지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왕립예술학교에 다녔던
맬컴 몰리는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던 스퍼어와 카렌 웨이트 같은 화가들을 "훌륭한 화가"라고 부르며 좋아했으나 "왕립예술학교는 교육에 있어서 끔찍한 곳이었다"라고 기억한다.
"언저리 나는 것 등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배운 것이라고는 선생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하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앨런존슨 : 1937~
1961년 런던에서 젊은 현대 작가전에 출품하여 데뷔하면서 팝아트의 기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63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수상하였다.
*맬컴몰리 :영국의 미술가. 1960년대 중반 극사실주의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표현주의로 돌아서 영국의 신구상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1984년 제1회 '터너상' 수상자이다.
출생-사망 1931.6.7 ~ 2018.6.1
1958년 뉴욕으로 이주할 때 몰리는 "마르셀 뒤샹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채" 미국에 도착했으나 그 뒤 미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사고"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왕립예술학교의 다른 학생들 역시 회화를 진지한 숙고 대상으로 삼는데 같은 실패를 겪었다고 언급했다.
왕립예술학교의 선임 강사들은
*모이니핸이 1951년에 그린 (단체 초상화 1951)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체 초상화)는 전시 1951년을 위한 60점의 회화 작품'에 제출한 회화학부의 교수. 강사들을 그린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수상하지는 못했다.
모이니핸은 왼쪽에 앉아 있는 낙담한 민턴과 그를 응시하며 서 있는, 곰 인형을 연상시키는 안경 쓴 웨이트를 함께 그렸다.
그림에는 불러, 콜린 헤이스 및 오른쪽 긴 의자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턱수염 난 스피어도 등장한다.
모이니핸의 단체 초상화는 전후 런던의 음울함을 완벽하게 포착한 나름대로 성공적인 작품이다.
모이니핸은 부주의하거나 안전 지향적인 미술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59년경 그는 추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 그림과 존스의 생각하는 미술가는 색채, 감정, 개념, 역사적인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대비된다.
*로드리고 모이니핸 : 마가렛 대처 초상화로 유명하다
로드리고 모이니핸, 단체 초상화, 1951
모이니핸과 달리 왕립예술학교의 새로운 화가 무리는 추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회화학부 학장인 스피어와 웨이트를 격분시켰다.
두 사람은 모든 학생을 소집하여 1학년 때에는 누구도 실험적인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기조는 이후로도 계속 유지되었다.
웨이트는 볼링에게 추상화를 그린다면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존스는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그러나 추상은
"처음 경험한 것이고 다루어야 대상이었다. 지금도 사실상 추상표현주의가 나의 바탕이 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구상적인 목적을 위해 오용하고 있다. 나는 결코 형상을 버릴 수 없었다."
이런 태도는 두 배로 불손한 것이었다.
구상 회화의 일반적인 방식과 플록, 로스코, 뉴먼의 전위적인 접근 방식 양자 모두를 조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볼링은 그의 동시대 작가들이 모두
"추상에 대해 농담을 건넨" 것이라고 설명했다.
때때로 이 젊은 왕립예술학교 화가들의 무리는 영국 팝아트의 2세대로 불린다. 그러나 '팝'이라는 꼬리표에 만족해하거나 그것을 오랫동안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들은 추상표현주의의 서사시적인 장엄함에 생각하는 미술가가 풍부하게 담고 있는 요소인 유머와 성, 인간성의 요소를 나름의 방식으로 결합하여 첨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런던 작업실의 앨런 존스
1965년경. 배경의 그림은 남성 여성.으로, 헌재 테이트에 소장되어 있다.
1960년에는 접점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열린 듯 보였다. 계급, 성, 인종의 사희적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긴 했지만 약화되거나 와해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미술가, 디자이너, 사진가 등의 창조적인 사람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계층, 단 출신 성분이 아니라 재능과 에너지로 정의되는 하나의 집단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학생들 중 많은 수가 미술이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배경 출신이었고 런던 출신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1959년 왕립예술학교에 모인 재능의 면면을 고려할 때 이 신입생들이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존스는 "주변 학생들과 비교할 때 다소 학습 지진아"처럼 느껴졌다.
그는 당시 그들의 학습 능력이 자신에 비해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했다.
호크니가 왕립예술학교에서 제작한 최초의 작품인 해골 드로잉은 사실상 그를 20세기와 21세기의 뛰어난 대표적인 미술가로 만들어 준 명확하고 세밀한 선을 이미 증명했다. 호크니는 브래드퍼드 미술 학교에서 4년 동안 드로잉을 공부한 경험을 통해 기량을 닦았다.
이 타월 한 능력은 호크니로 하여금 대학 당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3학기 말 학장 다윈이 학생들에게 퇴학을 명했을 때 대상자 중 한 명이 존스였다.
그러나 존스처럼 서툴렀던 호크니는 뛰어난 솜씨 덕분에 퇴학을 면할 수 있었다. 존스는 이렇게 추측했다.
"그들은 해골드로잉을 보고는 호크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릴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뜻했죠."
" 볼링의 의견 역시 같다.
'호크니가 그 해골을 그리지 않았다면 퇴학당했을 겁니다."
처음 몇 주간 적응 기간을 거친 뒤 호크니는 필립스 등 다른 몇몇 학생처럼 추상표현주의 양식으로 크고 느슨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무 점가량의 그림을 자칭 (데이비 겸 폴록 겸 힐턴) 양식으로 그렸다.
"음, 나는 그것이 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 막다른 길에 처하게 되었다.
호크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 작업이 무의미하고 '무력'하게 보였다.
호크니는 생각했다.
'나는 결코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어."
호크니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다루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작했는데, 당시 추상에 대한 신념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실제 인간 형상을 묘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까닭이다.
역설적이게도 왕립예술학교의 교수는 비록 호크니의 궁극적인 작업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 작업을 반겼다.
호크니는 신중하게 나아갔다.
그가 생각한 첫 해결책은 개인적인 메시지 그림 안에 단어의 형태로 은밀하게 삽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단어가 인간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단어 하나가 하나의 인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림 표면에 단어를 배치하면 보는 이는 즉각적으로 그 단어를 읽게 되며 그림은
"그저 물감에 머물지 않는다."
호크니의 작품에 처음 등장한 단어 중 하나는 '타이거'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동명의 시(1794)에서 가져온 단어였다. 호크니의 동료 학생들이 와서 작업 중인 그 작품을 보고는 "그림 위에 글씨를 쓰다니 웃기는 일이네. 알겠지만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말도 안 되는 짓이야."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호크니는
'너희들이 무언가가 나오고 있는 것 같이 느낀다니 기분이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실 다름 아닌 호크니 자신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뒤 몇 년에 결처 호크니의 그림은 점차 고백이 되어 갔다.
그림 위에 쓰인 문구는 젊은 동성애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가리키며 그가 어떤 사람 인지를 드러낸다.
1961년에 제작된 두 작품 함께 껴안고 있는 (우리 소년) 같은 작품에서 사람의 형상이 다시 나타났다는 점 역시 특이하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이 그림들에는 장 뒤뷔페부터 베이컨, 추상표현주의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향이 한데 뒤섞여 있다. 그렇지만 개성 있고 주목할 만한 면모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크니의 작품 함께 껴안고 있는 우리 두 소년_(1961)
앞에 선 호크니와 보시어, 1962
퇴학에도 불구하고 1961년 존스는 매년 개최되는 전시'젊은 동시대인들'의 총무로 선출되었다.
역설적이게도 1949년 이 전시를 처음 기획. 제안한 사람은 웨이트였다.
웨이트는 '상황'전의 전시 장소였던 서픽 스트리트의 RBA 갤러리가 미술 학도들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전시하는 장소로 적격이라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왕립예술학교 학생들의 작품이 지배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미술 학교 출신들도 합류했다.
첫 번째 시도는 난장판처럼 보였다.
기본적으로 슬레이드 미술 학교 출신 학생들의 그림과 맞대결했다.
1961년 1월 전시가 개막하자마자 왕립예술학교에서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호크니에 따르면 "영국에서 윗세대로부터 영향을 반지 않은 학생들의 회화 운동으로는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미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도시와 연결 짓는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상업 디자인, 그래비티 같은 요소를 받아들여 작품에 '도시성과 동 시대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호크니의 언급처럼 이 전시는 상당한 충격'을 일으켰다. 당시 슬레이드 미술 학교 학생이던 워나콧은 교사였던 아우어바흐에게 호크니가 최근 완성한 사랑` 연작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대체 이게 뭐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우어바흐는 '맞아. 아주종은 그림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낯선 감성이 있었습니다."
그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학생들의 작품을
보기-(아마도) 구입하기ㅡ
위해서 사립들이 왕립예술학교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곧 호크니에게는 그의 작품 거래를 몰래 담당하는 미술 거래상이 생겼다. 그의 이름은 카스민으로, 런던 미술계에 새롭게 등장한 영리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존스의 경력 역시 갑작스럽게 비상했다.
아르투르 투스 앤드 손스와 계약을 맺었고, 투스의 피터 코크런이 영국의 몇 안 되는 부유한 현대 미술 수집가 중 한 명을 존스의 작업실에 데리고 왔다.
"이 퉁명스러운 북부 지방 사람이 들어와서는 손을 내밀고 내 이름은 파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듣기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내 이름은 가난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존스에게나 그의 동시대 작가들에게나 존스의 대답은 오래지 않아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