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제국 : 임근혜
골드스미스대학교와 왕립예술학교에서 6년 동안 미술을 배운 뒤인 1955년, 라일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졸업했다.
"나는 그런 상실감속에서 정말로 절박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찾고자 노력해야 하는 정말로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했습니다."
라일리는 이후 2년의 시간이 "기나긴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녀는 교통사고로 다친 아버지를 간호하며 시간을 보낸 뒤 심각한 좌절감에 빠졌고 판매원 일을 하다가 마침내 월터 톰프슨에 취직했다.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의 문제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것은 사실 매우 일반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전통이 부재하는 곳에서 거의 모든 미술가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전통이 주제와 기량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기 때분이다. 전통은 또한 후원자를 제공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부재할 때 스스로 돌파구를 찾는 것이 월
씬 더 중요해진다.
다른 사람들처럼 라일리도 1958년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폴록의 전시를 보고 자극받았다.
그녀는 분명 "'현대 미술은 살아 있고 내가 반응할 대상이 있다"라고 결론 내렸다.
라일리는 이듬해 여름, 리즈예술대학교의 미술강의를 들었고 바우하우스의 이론을 토대로 가르쳤다. 그가 강조한 색채와 형태에 대한 분석 연구는 라일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라일리는 이탈리아 미래주의자 자코모 발라의 작품을 연구했다. 발라는 사진 필름의 다중 노출 같은 명멸하는 리드미컬한 선을 통해 움직임을 재현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라일리는 또한 조르주 쇠라 자의 작은 풍경화를 모사했다. 그녀가 선태한 쇠라의 작품은
(쿠르브부아의 닭 1886~1887)로, 센강의 고요한 흐름을 색 점의 모자이크로 분석했다.
"쇠라는 명쾌하다. 그의 생각을 뒤쫓아 갈 수 있다. 그는 인상주의를 어평게 합리화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생각에서는 확고한 토대를 찾을 수 없다. 적어도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명쾌한, 곧 분명한 사고와 논리적인 구조가 라일리의 깊은 관심을 끈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라일리의 작품에서는 이 세심한 분석만큼이나 감정의 소용돌이도 중요했다. 비단 연애뿐 아니라 20세기 미술과의 새로운 대결, 그리고 20세기 미술에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추가할 수 있는지, 이 모든 일에서 끝나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그림, 오로지 검은색만을 사용하여 애도하는 캔버스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작은 목소리가 그 작품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속삭였다.'그 작품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대조도 없었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서 그녀는 두 형태의 만남, 또는 헤어짐을 나타내는 흰색 부분을 추가했다. 위쪽 형태는 신체의 윤곽선처럼 아랫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쪽은 직사각형을 이룬다 이두 형태는 가깝게 당을 듯하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두 형태를 가르며 중간에 자리 잡은 흰색 영역의 가늘고 미세한 공간이 전체 화면에 긴장감을 자아낸다. 라일리는 작품 제목을 입맞춤.(1961)으로 정했다. 이 작품은 그녀에게 한증 신화 된 가능성을 제시해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좋아. 한 장만 디 그리 보자."라고 말하고는 작업을 시작했다.
라일리는 서서히 희미하게 빛나면서 사라지는 그림을 그리는 실제 광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의 에너지로 진동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는 걸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라일리의 추상의 측면에서 볼 때 소용돌이치는 풍경에 해당하는 매우 강 결한 시각적 감각을 전해주었다.
그림은 바라보거나 안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그림이라기보다 보는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작품이었다. 예를 들어 산마루 (1964) 앞에 서면 세계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대개 정적이고 안정적일 거라고 예상하는, 가녀린 선으로 덮인 패널에 파동이 일어나고 요동이 친다. 라일리가 실제로 사용한 흑백률 외에 희미하게 빛나는 분홍색과 청록색, 녹색 등 다른 색이나 나타났다 사라진다.
라일리는 그녀의 그림이 마약에 취하기 위한 이상적인 배경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의견만큼이나 그녀가 흰색 가운을 걸친 과학자라는 의견에 대해서 분개했다. 1965년 그녀는 그녀의 작품이 '예술과 과학의 결합'을 나타낸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결코 "어떠한 과학 이론이나 과학적 데이터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광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며 활용한 수학은 그저 이등분, 사등분과 같은 "기초적인 수준"의 단순 연산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과학자가 아닌 미술가였다.
라일리의 작품이 기술자가 기계를 설계하는 방식처럼 요소별로 구성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접은 그녀도 인정했다.
"나는 기사처럼 선으로부터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검은색과 흰색으로부터 선과 원. 삼각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 알아냅니다"
그렇지만 작품 내적 구조의 균형과 감각은 과학이나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전통적인 훈련인 실물 드로잉으로부터 생겨났다.
학생 시절에 그린 드로잉에는 균형감 또는 그녀가 '구조의 분식'이라고 부른 것이 모두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십 년을 훌쩍 넘긴 작품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신체가 더 이상 있지 않을 뿐이다. 말하자면 사라진 고양이가 남긴 활짝 핀 웃음인 셈이다.
라일리는 "추상은 오직 실물 드로잉의 바탕 위에서만 실천될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즈음 흥분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노동당의 새 대표는 다가오는 과학 혁명의 뜨거운 '백열'에 대해
'전쟁 이후 세계는 유례없는 흥분을 자아내는 속도로 앞을 향해 돌진해 왔다. 과학자들은 지난 이십 년간, 이천 년 동안 이룬 것보다 휠 신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라일리의 예술적 근원에 상관없이, 시대 부합하는 그림 제작 방식은 거의 우연히 접했다.
1963년 4월 본드 스트리트 118번지에 문을 연 카스민의 갤러리는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60년대 영국의 일반적인 실내와 비교할 때 카스민의 갤러리는 특이했다. 방문객들은 전시되고 있는 예술 작품만큼이나 공간에도 매료되었다.
사실 카스민은 사람들이 골이 진 고무바닥을 보기 위해 갤러리 안으로 들어와서 조금 성가셔했다. 미술 작품이 없을 때에는 가구와 그 부속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65년 2월 뉴욕 현대 미술관의 전시 '반응하는 눈'의 개막식에서 라일리는 아연실색했다. 이 전시는 새로운 운동인 옵아트에 대한 체계적인 차원의 연구 조사를 토대로 기획됐다. 옵아트는 매우 참신한 경향 이어서 전해 10월에서야 그 이름이 붙여졌다. '반응하는 눈'에 참여한 99명의 화가와 조각가 중 많은 수가 광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라일리는 결단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이 광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과학적인 그림을 그리겠다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용어조차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옵아트는 하나의 스타일로 한창 유행 중이었다. 라일리에 따르면 전시 특별 초대에 참석한 사람들 중 대략 절반가량이 그녀의 작품을 반영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라일리는 현대 미술관 곳곳에서 조잡한 도용 작품뿐 아니라 그녀의 작품에 대한 오해와 부딪혀야 했다. 그녀는 또한 한 미술관 이사와의 굴욕적인 만남까지 겪어야 했다.
그녀의 분노가 널리 알려져서 예술가에게 작품의 저작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미국 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그 법안은 '브리짓 법안으로 불렸다.
라일리의 작품은 세계를 묘사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를 변화 왜곡과 환각적인 방식으로 말미암아 공상 과학의 원천이 되었다.